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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1만 2천년 이전의 찬란한 문명 발굴



[스크랩] 1만 2천년 전의 찬란한 문명 발굴



터키 괴베클리 테페의 놀라운 점은 12000년 전 유적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당시 괴베클리 사람들이 신전을 보수하고

건축하는 기술이 시간이 갈수록 저하됐다는 것이다.

 

가장 초기의 원환은 가장 크고

기술과 공예 수준에서도 가장 발달했지만 후대로 진행됨에 따라

모양이 갈수록 초라해졌고 대수롭잖게 설치된 듯했다.

 

게다가 기원전 8200년 경, 이 공정은 완전히 정체 상태에 빠졌는데

괴베클리 테페는 철저히 쇠락해졌고 더는 부흥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괴베클리 테페뿐이 아닙니다.

 

볼리비아, 푸마푼쿠 14000년 전

이 문명도 날이 갈수록 기술 수준이 쇠퇴했습니다.

푸마푼쿠의 초기 기술들은 현대 정밀가공 장비로도 재현 불가능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 모델을 가지고

인류사를 멋대로 단순화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우리 1만년 역사를 수긍하지만,

인류사는 우리 1만년 역사가 인류시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모델이 아닙니다.

 

인류사는 지구 다수의 지역에서 

다수의 인종과 다수의 문명이 명멸한 '티형 모델'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문명이 항상 발달한 것도 아니고

존재치 않았던 기술력이 나타났다가 시간이 흐를 수록 잊혀진 문명이 있습니다. 

그 문명의 주인공들이 누군지 모르는 겁니다.

 

칠레에서 수 백구 발굴되는 긴머리 두개골은 인간의 두개골과 골편이 다릅니다.

인간은 정수리가 3쪽인데 긴머리 두개골은 2쪽입니다. 


최근 발굴에서 밝혀지고 있는데 이 사실을 수긍하자니

모든 것을 틀렸다며 뜯어고쳐야 하니까 과학계에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선도적인 고고학자들은 기존학계에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호모플로렌시스 발굴에 따른 인종다원론입니다.

국제 학술회의에서 인정받았습니다.

 

 

하나로 시작해서 한줄기로 진보해온 인류사가 아니고 훨씬 복잡한 인류사.

 

별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듯이

인종도 하나가 아니면 하나가 아니라고 인정한 위에서 토대를 세우면 될 텐데,,

유일신이니 뭐니.. 자꾸 자기것 하나라고

박박 우기는 인간의 습성이 진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북극성, 직녀성 기원이 있으면

시리우스 기원을 철썩같이 전승해오는 인종도 있는데 

하나로 다 처박을라니 그게 됩니까?

그것은 남의 기원을 말살하고 하나로 처박을려는 제국종교적 생각입니다.

 

도곤족 찾아가면 시리우스에서 왔다며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데 

그 문물을 말살하고 '너는 북극성에서 왔으니 엎어져'.. 이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만일 그런다면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그 사람들과 다를 바가 뭐가 있지요?

 

 

볼리비아 푸마푼쿠, 14000년전


 

 

 

 

터키 괴베클리 테페, 12000년전

 

 

[시사중국]


1994년 가을, 독일의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는

터키 동남부 지역의 가장 큰 도시인 우르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약 14km 떨어진 긴 산맥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는 둥그런 지형이었다.


슈미트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방대한 부싯돌 부스러기를 발견했다.

수 천년 전에 수십 명 혹은 수백 명 사람이 모여 공동 작업을 한 장소임을 직감했다.

그는 곧 독일 고고학연구소와 우르파 박물관과 합작해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발굴에 착수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진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는

지금까지 발견된 고대 건축 구조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괴베클리 테페의 ‘테페(tepe)’는

곧 테페이(teppay)라고 발음하는데 터키어로 ‘배꼽 언덕’이라는 뜻이다.

 

수십 개의 거대한 돌기둥이 겹겹이 둥근 원을 이루고 있으며,

인류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기존의 가옥구조 보다 더욱 크고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 돌기둥들은 1만 1600년 전에 세워졌으며

기자 대 피라미드보다 7000년이나 앞섰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전(神殿)의 형태도 있다.

터키 남동부 지역에서 건축물이 세워진 시기에

세계 어디에도 이와 비교할만한 규모의 건축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의 돌기둥이 다른 하나의 돌기둥을 받치는 형태는

마치 영국의 스톤헨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스톤헨지보다 약 2배는 오래됐다.


괴베클리 테페의 기둥들은 거칠게 깎인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조각되고 새겨진 석회석 기둥이다.

돌기둥엔 가젤과 뱀, 여우, 전갈, 멧돼지 등 동물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발굴 초기 슈미트 팀은 지면에서 몇 센티미터도 안 되는 곳에서 정교하게 조각된 돌을 발견했다.

계속해서 또 다른 돌들을 발견했는데

나중에는 여러 개의 직립된 돌기둥으로 형성된 원환(圓環)을 발굴해냈다.


몇 년 사이에 슈미트 팀은 두 번째의 돌기둥 원환을 발견했고

잇따라 세 번째, 뒤에는 더욱 많은 원환이 발견됐다.

그렇게 해서 2003년 탐사 결과,

발굴단은 적어도 20개의 원환이 복잡하게 겹쳐서 흙속에 묻혔다고 발표했다.

 

돌기둥은 매우 방대했다.

가장 높은 것은 5.5미터이고 무게는 16톤에 달했다.


돌기둥 표면엔 각종 동물 형상이 부조됐고 모양은 서로 다른 풍격을 지니고 있었다.

조각이 거친 것을 비롯해 비잔틴 예술품처럼 정밀하고 상징적 의미가 풍부한 것도 있었다.

슈미트는 또 산자락의 여러 곳에서 고대 유물이 어마어마하게 널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은 신석기시대의 칼, 도끼, 투척 무기 등 창고였다.

이 돌은 인근지역의 골짜기에서 운반해온 것이었다.

슈미트는 “이곳의 1, 2평방미터 범위 내에 널려있는 돌들은 많은 고고학자들이 기타지역 유적에서

발견한 것보다 더 많았다”고 말했다.

 

괴베클리 테페의 고고학적 연구를 종합해보면 그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당시 괴베클리 사람들은

몇 십 년에 한 번씩 돌을 묻고 새로운 돌기둥으로 대체하다가

이후 모든 원환이 부싯돌로 메워졌고

사람들은 또 부근에 완전히 새로운 구조물을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전반 유적지는 이렇게 발굴됐다가는 메워지고

다시 보수되는 식으로 몇 백 년이 지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점은 당시 괴베클리 사람들의 신전을 보수하고 건축하는 기술은 시간이 갈수록 저하됐다는 것이다.

가장 초기의 원환은 가장 크고 기술과 공예 수준에서도 가장 발달했지만

후대로 진행됨에 따라 모양이 갈수록 초라해졌고 대수롭잖게 설치된 듯했다.


게다가 기원전 8200년 경,

이 공정은 완전히 정체 상태에 빠졌는데 괴베클리 테페는 철저히 쇠락해졌고

더는 부흥하지 않았다.

 

 

 

괴베클리 테페의 발굴 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으며 이를 둘러싼 고고학계의 논쟁 또한 그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유적지가 기존 과학계를 뒤집는 인류 이전 과거의 유물로서

가장 중요한 곳임을 공통적으로 인정한다.

20년 전만 해도 대다수 고고학자들은 신석기혁명이 발생된 시간과 지점, 대체적인 과정에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괴베클리 테페의 고고학적 발견이 진행되면서 학자들은

기존의 역사 시기 분류와 관련한 학설을 뒤집어야만 하는 인류사적 고민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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