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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옮긴글] 메이지 유신의 실체



[옮긴글] 메이지 유신의 실체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정권을 찬탈한 전쟁이 바로 메이지 쿠데타이다.

메이지 쿠데타는 일본에 있어 근대화의 시작이었는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일본인들의 그들의 조상과 역사를 잃어버리는 비극적인 역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사무라이(武士) 나라 ‘일본

 

싸움을 '업(業)'으로 하는 일본 


한국과 일본 두 민족에 대하여 문(文).무(武) 두 길중 하나를 택하라면

  한국에서는 '문'을 일본은 '무'를 선택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 사실로 비추어 볼 때 누구나 다 인정할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단군시조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을 내세워 건국이념으로 삼았다.

그 이후 불교.유교가 국교가 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한민족은 평화를 사랑하고 무력을 거부하는,

 외교관계에서도 상대에게 예의를 다하고

친선과 우호를 우선 시하는 높은 도덕성의 선비문화가

국민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지금은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어 국교화는 되지 않지만

 이러한 국민성을 바탕으로 불교.기독교.카톡릭.이슬람교 등 세계적 종교가 대립의 벽이 없이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존경 받는 역사적 인물들도

세종대왕.이이.이황 등과 같은 학자이거나 학문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일본은 수많은 전쟁의 귀신들이 있듯이 문보다 무를 숭상하는 민족이다.

무는 문보다 완력이 더 강하고 결정적일 때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을 흔히 ‘사무라이 나라’라고도 말한다.


사무라이는 ‘칼 문화’를 뜻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칼이란 강한 힘 앞에서는 비굴하게 굴복하지만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무자비하게 상대를 제압한다. 

 이는 어떤 면에서는 죽음을 의미하고,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사무라이 문화란 상대의 피와 눈물 위에 쌓여진 문화라는 것이다.

이것은 살아남기 위하여 적을 속이고 완력에 의한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이분법 문화일 뿐이다.

 여기에는 선비문화와 같이 남을 배려하는 평화철학이 있을 수 없다. 

태권도와 같이 도(道)를 우선시하고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말하는 ‘사무라이’는 정치와 군사를 독점하고

 묘지(苗字. 성을 사용)와 다이토(帶刀 칼을 착용) 등의 갖가지 특권을 가지는 지배신분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의 지배자들은 칼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병법(兵法)을 공부하고 무술을 연마했었다.

일반 국민들 사이에 발생하는 분쟁은 막부나 지역 성주 다이묘 등 법에 의거 해결한다.


그러나 무사 사회 내부에서 발생하는 분쟁은 겐카(喧 --싸움)에 호소한다.

하지만 겐카에 의거 승패를 가리더라도 자기의 명예는 자력으로 지키는 것이 무사의 요건으로 간주되었다.

그렇게 때문에 겐카는 이들에게 있어 도덕과 평화철학이 없다.

살이 튀고 뼈가 부서지는 처참한 죽음을 즐기는 게임일 뿐이다.


이러한 칼의 문화에 대하여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들의 표현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일본인들은 조금만 불평이 있으면 문득 칼을 뽑아 서로 죽인다.

의심이 많아 부자간에 잠을 잘 때도 칼을 풀지 않는다.

남자는 칼 셋을 차고 다니는데, 큰칼은 남을 죽이는 데 사용하고,

 중간 것은 남을 막는데 쓰고 작은 것은 자살용이다.

얼굴에 칼 흉터가 있으면 용감한 자로, 머리 뒤에 있으면 비급한 자로 배척된다.

 기뻐하고 성내는 빛이 당장에 나타나고 속임수가 많다.”


또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일본에 잡혀갔던 강항(姜沆)이 저술한

  간양록(看羊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일본은 무(武)를 중시하는 분위기여서 칼로 싸운 흉터가 얼굴에 있으면 용기 있는 사람으로 존경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분에 못 이겨 서로 다투다가 원수를 죽이는 자는 장부답다고 불렀다.


 칼을 잘 쓰는 자의 자손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귀한 혼처를 얻었다.

권력자였던 장군들은 글을 몰라, 병법서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해

 곁에는 학식이 풍부한 스님이 항상 함께하고 있다.”


이렇듯 평화와 도덕적인 면을 강조하는 유교의 나라 조선인들의 눈으로 보면

일본은 부모와 자식이 서로 적이 되어 싸우고, 형제간에도 싸우는 야만 국가 그 자체인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무력.폭력을 행사하는 야만적인 겐카(喧)의 폐단을 잘 알고 있었다.

임진왜란 패전 후 조선과 명나라로부터 고립을 피하기 위하여 유교를 장려하는 등

평화를 정착시키는 정책을 수용했던 막부는

  겐카(喧)를 없애는 ‘겐카료세이바이(喧 兩成敗)’라는 법령을 만들었다.


이 법은 만약 겐카를 벌인 경우, 누구의 잘잘못에 상관없이 쌍방을 동등하게 처분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정착된 사무라이 문화의 폐단이 어디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이던가.


이에 대하여 야마모토 쓰네토모(山本常朝)는 그의 저서 ‘엽은(葉隱)’ 첫머리에서

사무라이의 딜레마를 ‘무사도란 죽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그의 논지는 “사무라이들이 겐카 등 선택의 장에 처해졌을 때는 죽을 가능성이 더 높은 쪽을 택하라.


그러면 살아남아 치욕을 당하고 비겁한 자로 욕먹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설령 겐카에서 이겨 살아남더라도

겐카료세이바이에 의거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 싸울아비


그렇다면 일본열도에 고대로부터 정착된 사무라이 문화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고대에는 오히려 한반도에서 많은 무사들이 일본에 도래하여 무술을 전해 주었다.

 백제의 ‘싸울아비’ 또는 경상도 사투리 ‘사나이’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는

 ‘사무라이’라는 어원 형성의 뿌리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열도가 무를 숭상하는 국민성이 된 이면에는

한반도에 대한 열등의식과 역사조작이라는 꽈리가 틀고 있다.


663년 백촌강 전투 패배 이후

일본열도로 건너간 백제인들은 패배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여기에 일본서기를 비롯한 역사서를 조작해서라도 신라를 극복하고자 했다.

또 신라의 침공 의심이 성을 쌓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현실적 대비를 병행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762년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痲呂)가 신라 침략 계획을 시작으로 

 수많은 한반도 침략과 노략질에서 보듯이 복수의 칼날을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백제계가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기존 신라.가야.고구려계와 치열한 정권 다툼이 사무라이들의 실습장이 되면서 칼의 문화에 상승 작용을 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일본역사에는 수많은 사무라이들의 난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이들은 힘은 오로지 칼끝에서 나온다.

즉 칼만이 그들을 지켜주는 절대적인 힘으로 신봉하게 되었던 것이다.


◆ 손자병법


사무라이들은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병학(兵學)이 필요했다.

사무라이들의 교과서이자 경전이 바로 ‘손자병법(孫子兵法)’이다.

손자병법은 6세기 중국 춘추전국시대 유교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유교는 한반도에서 꽃을 피웠지만 손자병법은

이러한 일본 사회의 여건에 편성하여 중국보다 일본에서 더 화려한 꽃을 피웠다.


서양에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의 ‘군주론 (Principe(The Prince)’이라든가

 칼 폰 클라우제비치(Carl von Clausewitz)의 ‘전쟁론(Vom Kriege)’이 있었다면

동양에는 손자병법이 있었다.


 이 곳에서는 종교와 윤리 도덕적 선악은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잘 싸우는 방법을 가르친다.

 침략하여 영토를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 각양각색의 기술을 알려준다.

사람을 죽이지 마라. 훔치지 마라.

이웃을 사랑하라 등의 도덕적이고 상식적인 가르침과는 정반대 사상이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선이란

전쟁에 나가면 이겨야 하는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이기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최고의 선인 것이다.


적의 인권 같은 건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기면 영웅, 지면 역적’ 일본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이 말은

전쟁에 나가 이기기만 하면 잘못된 점까지도 정당화되지만,

졌을 경우에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역적이 된다는 말이다. 

 병법에서 가르치는 악이란 전쟁에서 패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라는 나라는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상대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는 일정한 공식을 갖고 움직인다.

 모든 일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완벽한 시나리오에 의해 움직인다.


겉은 ‘스미마생’이라고 입에 달고 있어 그지없이 친절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남을 이기기 위해서 항상 비수를 숨기고 있는 근성은 바로 손자병법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는 속(혼네-本音)과 겉(다테마에- 建前)이 다르다는 단어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 근본정신에는 사무라이들의 경전 ‘손자병법’ 정신이 짙게 깔려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


손자병법 모정편(謨政編)에 나오는 이 말은 일본인들은 영원한 진리로 생각한다.

그리고 손자병법에 충실한 일본은 선제공격과 기습공격의 명수다.

그래서 일본은 상대방을 철저히 파악한 후에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서면 항상 선제공격을 시작한다.


명성황후시해사건.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진주만 사건 등

일본이 저질렀던 모든 전쟁이 그러했듯이

선전포고도 없는 비굴하게 야간 기습 또는 선제 침략이었다.

최근에는 제2차 한일어업협정과 다카노 前대사가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외치던 사건도 기습과 선제공격이었다.


그리고 평화철학이 없는 사무라이 나라 일본은 힘이 약한 자를 먼저 공격한다.

 정한론자들이나 후쿠자와 같은 자가 조선을 먼저 정벌하자고 했던 것이나,


 오늘날 일본사회에 만연한 힘이 약한 자를 괴롭히는

 ‘이지메’가 바로 이런 비열한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폭력을 멀리하고 문을 가까이 하고 있는 한국이

항상 일본으로부터 선제 공격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미국에 대해서는 ‘금붕어 똥’과 같이 따라 다니듯이

 상대가 강하다고 여기면 비굴할 정도로 상대에게 아첨하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 패전 후 유교를 받아들였던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는 전국시대와 같은 큰 전란이 없었다.

때문에 사무라이들은 싸움에 대한 실전감각이 둔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한(藩)에는 빠짐없이 병학 사범이 있어 무사들을 교육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평화스런 시대에도 일본은 무력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병학 학습에도 열중했다.


 힘을 심봉하는 일본의 자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근본에 있어서는 똑같다.

그리고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기본자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정한론을 주장했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요시다 쇼오인(吉田松陰) 등은 막부 말 대표적인 병학자들이다.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한 메이지정부의 중심을 이루었던 대부분이 그의 제자들이다.

이처럼 일본인은 오랜 세월 동안 전쟁에서의 승부를 중심으로 한 선악의 기준을 윤리기준에도 꿰어 맞춰왔다

. 그래서 일본에는 인도적이고 보편적인 선악의 기준이 매우 미약하다.

 더군다나 3류 사무라이들이 정권을 찬탈한 메이지 쿠데타를 거치면서

이러한 사상은 안개가 깔리듯 일본국민들도 모르는 사이에 더욱 심화되어 갔다.


1970년대 10만 표류 베트남 보트피플이 발생했다.

 한국은 바다에서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던 수많은 보트피플을 받아들였다.

지리적 여건상 베트남과 가까운 일본에도 예외 없이 난민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일본은 이들을 모두 죽음의 바다로 되돌려 보냈다.

인간으로써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비열한 작태가 아무런 도덕적 의심 없이 일본은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세계 비난 여론이 쏟아지는 등 일본에 불리해지자

가자미 눈을 한 일본이 이때 형식상 구출한 난민은 단 3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2004년 먹을 것을 찾아 목숨을 담보로 탈출한 북한 난민들은 심양 일본영사관으로 몰려 들었다.

하지만 일본은 이들을 모두 영사관 밖으로 내쫓아 중국공안에 인계하였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작태는 보통 인간의 상식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듯이 일본은 평화를 사랑하고 타민족을 존경하는 철학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평화주의와 인권존중 철학이 확립되지 않은 비열한 3류 사무라이 사상이

자신도 모르게 물들어 있는 일본이 만약 국가주의가 다시 부활이라도 한다면,

언제라도 국가이익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다시 인권을 무참히 짓밟고,

다른 나라 국민들을 학살하는 상황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것이다.

 

 

모순으로 점철된 메이지 쿠데타



 1853년 미국 페리제독(M.C.Perry)에 의한 일본 개항요구는 극심한 대립으로 이어지는 혼돈의 시대였다.

당시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는 유교를 장려하는 등 기본적으로 대외 평화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막부는 국내 사정과 세계역사의 흐름상 개항은 불가피한 상황으로 판단하고 개항을 결정했다.

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차례로 조약을 맺었다.



그러자 막부의 외교를 매국행위라고 맹비난하면서 막부 타도를 외치는 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츠마한(薩摩藩 현재의 가고시마)과

 요시다 쇼오인의 죠슈한(長州藩 지금의 야마구치현)이 연합한 세력이었다. 


 이들 세력들은 막부를 나약한 정부로 몰아 부치며 부국강병이라는 미명 아래

존왕양이(尊王攘夷 왕정복고와 서양세력을 물리치는 정책) 사상을 내걸고 준동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868년 메이지 삼걸(三傑)이라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사진左),

키도 타카요시(木戶孝允.사진中),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사진右)가 중심이 된 세력들이

 고오메이(孝明)일왕을 독살하고, 메이지 일왕을 내세워 쿠데타에 성공한다.


이것이 메이지 유신 즉 메이지 쿠데타이다.





하지만 이들은 막부를 대신하여 일본열도를 통치할 역량도 인재도 애초부터 없었던 집단이다.

이들은 막부시절 오랫동안 핍박 받아오던 농민출신 하급 사무라이들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이 하급 사무라이라는 것이다.

메이지 정부의 중추적 역할을 한 이토오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도 농민 출신의 하급 무사였다.


 이들은 상대방을 생각하고 칼등을 쓰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와 같이

 문과 무를 겸비한 1급 사무라이가 아니다.

권모술수와 잔인함을 무기로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철학의 깊이가 없는 3류 사무라이들이었다.


정권 찬탈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들 3류 사무라이들은 쿠데타에 대한 명분이 필요했다.

하여 이들은 실권이 없는 메이지 일왕을 옹립하는 근왕도막(勤王到幕)을 주창하여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길에는 신분제 폐지 등 순기능도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많은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1. 메이지 쿠데타는 근대화라는 명분과 중앙집권제 왕정복고라는 상반된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2. 왕정복고의 기치를 내걸면서 기존 고오메이 왕을 독살하고

그들과 코드가 맞는 메이지 왕을 내세우는 파렴치를 범했다.

 이것은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3. 그들의 무능력을 숨기기 위해서 왕을 방패막이로 삼고자했다.

오랜 세월 동안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일왕을

최고급품이라 불리는 보석 '교쿠(玉)' 즉 '살아있는 신'으로 부르게했다.

  그리고 일왕을 숭배하는 국가신도를 만드는 등 왕정복고를 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내각이 정권을 좌지우지하여 왕을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막부정치와 전혀 차이가 없었다.


4. 내각을 구성하면서 쿠데타에 참가한 출신 지역별로 안배하는 갈라먹기 식 패거리 정치를 도입하여 

 정치개혁이 되지 않았다. 그 영향으로 지금도 일본 정치권에는

누구파, 누구파하듯이 계파별 패거리 정치가 형성되어 있다.


5. 개항을 했던 막부를 허약한 정부라고 맹비난하면서 ‘존왕양이’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그들이 집권하면서 기존 막부가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맺은 조약을 모두 인정하였다.


6 왕권을 제한하는 유럽식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면서도 메이지 헌법 제1조에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일왕이 통치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국가의 주권이 일왕에게 있다고 하여 스스로 민주주의 국가임을 부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침략전쟁 패전 당시 일왕에게 전쟁 책임이 없다고 항변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7. 메이지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칙령 12호를 발동시켜 

 실제는 ‘국가신도’를 종교 위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국교로 채택하였다.


8.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왕 즉 살아있는 신의 절대적인 명령이라는 칙령(勅令)을 만들어 독재국가를 만들었다.


칙령은 어떠한 비판이나 불복종을 허락되지 않는다

. 메이지 쿠데타 세력들이 진실된 자료를 되도록 대중화하지 않도록 하여

 그들의 무능력과 모순 등 허망한 정치력에 대한 국민들의 건전한 비판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초법적인 제도를 말한다.

 메이지 쿠데타 세력들은 통치 목적으로 의회의 승인이 필요 없는 칙령을 충분히 활용하였다.


9. 어떤 뉴스든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것을 철저히 검열했다.


사전검열은 물론 사후 검열도 심했다고 한다.

오자 하나 때문에 신문이 폐간되기도 했다고 한다.

 1898년 5월 24일 요미우리신문은 사설에서 全知全能을 無智無能으로 잘못 썼다.

 이에 요미우리신문은 폐간을 면하기 위하여 즉시 호외를 발행해야만 했다고 한다.

세계 언론사에 글자를 바로 잡기 위하여 호외를 발행한 첫 신문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이와 같이 메이지 쿠데타를 일으킨 능력이 없는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은 

 국가의 근본을 모순과 모순의 충돌이 일어나자

 조작과 조작으로 연결된 토대 위에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에 일본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숨어 있다.


이들의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은 내란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이에 이들은 ‘적을 베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식으로 반대파를 무지막지하게 제압하는 ‘殺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즉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는 殺보다

德을 중시하는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철학을 거부하고,

 ‘새가 울지 않으면 울게 해주겠다’는 식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비열한 생각을 도입한 것이다.

피로 얼룩진 전쟁과 악랄한 살인을 선택함으로써 300여 년간 지속되었던 평화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선택한 모순과 이중성, 무능력을 숨기고

 국민들을 다잡기 위해서는 일왕이라는 상징적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일왕을 살아있는 신으로 조작하는 황국사상을 더욱 조작하기 시작했다.


  황국사상이라는 망국적 사상을 조작하기 위해서는 역사조작이라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또 국민들의 불만과 그들에게로 향한 칼끝을 밖으로 돌리기 위하여

사다 소이치로(佐田素一郞)를 비롯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이 주창한 정한론(征韓論)의 달콤한 유혹에 빠지기 시작했다.

정한론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역사조작이 진행되었다.


일본만이 세계 유일하게 우수하고, 이웃국가들은 미개하다고 비하한 ‘역사조작’과 ’황국사상’은

 부모형제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마약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인들은 부모형제 간에도

서로 죽이고 죽는 비열한 3류 사무라이의 나라. 살인의 전장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이중성을 가지고 근대화가 시작된 것이

 오늘날까지 속과 겉이 다른 일본인들이라는 비아냥의 시초가 된 것이다.


 즉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주위에서 무엇이라 하든 무엇이든

 그들이 편한 대로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브레이크 없는 우익과 군부라는 폭군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말하는 진정한 사무라이라고 하면 정정당당하게 겐카에 의거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

하지만 메이지 쿠데타를 일으킨 자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들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청일전쟁.러일전쟁,중일전쟁.

진주만 공격 등 수많은 전쟁에서 보듯이 비겁하게 책임 회피, 야간 기습공격, 선제 공격하는 등

전형적인 3류 사무라이의 행동이었다.

어느 것 하나 일본이 자랑하는 무사도와는 절대 거리가 먼 것이다.


일제의 아시아침략 전쟁 패전 당시를 되새겨 보자.


일제가 패전으로 치닫을 당시

 '신의 나라'에 사는 것을 감사로 여기고 살아 있는 신을 위하여 죽는 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이도록

 제국헌법과 교육칙어로 쇠뇌시켰다.

일왕에게 절대 복종하도록 교육받고 세뇌 당한 국민들은

 하와이 ‘만세 절벽’이나 오키나와 전투 등에서 보듯이

‘일왕폐하 만세’를 부르면서 죽어 갔다.


일본이 자랑하는 무사도 즉 알량한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전원 자살을 강요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 패전의 최정점에 서서 전쟁을 독려했던 사무라이들은 어떠했는가?


일본의 최고통수권자였으며 일본군대의 대원수를 겸임하여 패전 책임의 최정점에 있던 히로히토 일왕,

‘살아서 적의 포로가 되어 욕을 당하지 말지어다’라는 전진훈(戰陣訓)을 통하여

자살을 강요했던 전쟁 내각의 수상이었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사진),

성병과 정신병을 빙자하여 도망친 오오가와 슈메이(大川周明),

 그 외 현장의 이슬로 사라진 A급 전범들.

 이들이 진정한 사무라이라면 당연히 자살로 그 죄를 씻어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했던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었다.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같은 자는 그 이후 수상까지 지냈다.

 전후 일본 정치세력들의 대부분이 아시아침략전쟁에

직간접으로 간여했던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더욱 비열해 진 것은 오늘날 일본국민들이다.


작금의 일본은 일본국민들은 물론이고

세계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도조를 비롯한 비열한 사무라이들을 영웅으로 되살려 열광하더니

이제는 아애 ‘A급 전범은 전범이 아니다’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이것이 일본이 자랑하는 진정한 무사도인지 물어보고 싶다.

 

 

과거는 있으나 역사가 없는 일본


고대 일본을 통합하기 위하여 ‘기기(記紀: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조작했듯이

  메이지 쿠데타 세력들은 그들의 무능력에서 비롯된 모순과 모순을 숨기고

 국민들을 다잡기 위하여 역사를 재차 조작하기 시작했다.


메이지 정부 3류 사무라이들은

 “역사를 조작하면 그 나라가 망한다” 라고 주장했던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이야기는 먼 나라 전설로 치부했다.

  ‘거짓말도 백 번 하면 진실이 된다’,

 ‘대중은 작은 거짓말 보다 큰 거짓말에 쉽게 속는 법이다’ 라는 히틀러식 역사조작 수법을

우매한 국민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하여 역사조작 판도라상자를 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국수적 학자들과 언론을 총동원했다.



역사조작은


1. 고대 일본이 한반도 속국이었다는 열등의식에서 탈피하고,
1. 이웃나라 민족의 조상, 역사, 신까지 조작하여 가치를 격하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일왕의 가치를 높여 조작된 황국사상과 국가신도에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1. 이로 인하여 국민들을 과거를 모르는 역사치매에 걸리게 하여 3류 사무라이들의 충견으로 만들어
1. 3류 사무라이들에게로 향한 칼끝을 돌려 이웃을 침략하는데 사상적 근거로 활용하기 위하여 조작하였다.


이들의 역사조작은 난징대학살보다 더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3류 사무라이들의 인간 광기가 서린 역사조작에 의거 일본인들은 역사치매에 걸려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일본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이들의 광풍은 붉은 노을보다 더 붉게 물들게 되었다.

역사조작은 일본열도에 과거는 있으되 역사가 없는 땅으로 만들고 말았다.

 역사조작의 위력은 핵폭탄 수만 개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가지게 되었다.


역사조작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나라는 한국과 일본이다.

 일본이 조작한 역사는 바로 한반도의 역사이자 일본의 역사였으며, 일본의 모든 것이었다.


일본이 저지른 역사조작의 서막(序幕)은 ‘기기’이지만

최종적으로 희대의 역사조작 걸작품을 만든 자는 바로 메이지 쿠데타를 일으킨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다.

 일본은 조작된 역사를 일본인은 물론 전세계로 확대시켰다. 

 그리고 역사조작을 하면 단시일에 유명해지는 곳이 오늘날 일본이다.

 2005년 7월 한국을 헐뜯고 조작된 내용으로 가득 찬 ‘혐한류 (マンガ 嫌韓流)’라는 단행본 만화가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듯이 역사조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제2 분서갱유


이들이 조작한 역사를 별도의 ‘역사조작’ 카테고리에서 일부 정리하였지만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일본열도로 패주한 백제인들이 신라에 패한 역사를 지우기 위하여

 조작.기술한 일본서기에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단어를 찾아내어 이를 확대 재생산


2. 1874년 조작된 임나일본부를 측면지원하기 위하여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던 칠지도 발굴 및 조


3. 1879년 300여 년 전 한반도를 침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악랄한 전쟁혼을

국민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하여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 및 코무덤(鼻塚) 중건


4. 1880년대 광개토태왕비를 조작하여 임나일본부가 실존한 것처럼 대대적으로 선전


5. 고대 일본열도가 '한반도 속국' 이었음을 나타내는 흔적을 지우기 위하여

일본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한반도 관련 단어.지명.신사의 이름을

 ‘일본어의 비밀’에서 언급했듯이 범 국가 차원에서 일본식 발음으로 개칭 작업 착수


6. 일본 왕가(王家)의 뿌리가 가야.백제 왕족이었음을 숨기기 위하여

 일왕가를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조작하면서 황국사상을 확대 포장


7. 이들이 조작한 역사가 모순으로 충돌하자 일본을 신의 나라라고 조작하면서

 일왕을 ‘살아있는 신’으로 조작하여 이를 신봉하는 국가신도를 조작하였다.

그리고 일왕의 만수무강을 기리는 노래 '기미가요'를 만들어 지금까지 일본의 국가로 사용하고 있다.


8. 이를 뒤받침하기 위해서 한반도.일본.대마도.중국에 보유하고 있던 단군조선을 비롯한

 고대역사서 수십만 종 기록들을 불태워(焚書)버렸다.


9. 일본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한반도와 관련된 고대역사를 지우고. 조작했으며,

 ‘삼국사기 및 고대 한국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조작서임으로

 절대로 보지도 말고 참고도 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또 한반도인들에게 선조들의 추악한 면을 들추어내어 열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최대 역점으로 여겼다

.(1927년 조선총독부 대외비 조사자료 제20집을 근거로 세종출판사 하종근著 '일제식민관료가 분석한 조선인'참조) 

하지만 최근 과학기술의 발달과 많은 학자들의 노력으로 진실이 하나 둘 밝혀지기 시작하여

 神은 진실을 선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 하라타 사카에루(原田榮)는1981년 4월 그의 저서 <역사와 현대>에서 다음과 같이 폭로하고 있다.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인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동경제국대학 교수가

 대마도에 사료 탐방을 하였을 때


한국과 관계가 있는 문서, 고기록 등이

대마도 번주(藩主) 家에 있는 것을 알고,


고문서류(古文書類) 66,469매,

고기록류(古記錄類) 3,576권,

 고지도 34매

, 두루마리 고화류(古畵類) 18점,

그림 53점 등을 은폐 또는 분서(焚書)했다".


“조선총독부가 1926년 12월부터 1938년 3월까지 사이에 

 조선에서 탈취한 수집사료 4,950책,

사진자료 4,511매,

문서기록, 초상화, 긴 액자 등 4,513점에 달한다.


” 또 그는 분서의 사유를 “백제. 가야의 제왕(諸王)이

일본의 일왕이 되었다는 것이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에 경악(驚愕)하여

  동종(同種)의 문서를 대마도 종(宗)씨로부터 거두어 들이지 않으면 위험

(향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 두려워)하다는 판단에 달한 것이다


☞ 사시요시히코(佐治芳彦)는

 <야마타이국말살(邪馬台國抹殺)의 미(謎)- 어느 누구도 몰랐던 한국문서>

(1981년 9월)에서

 “일제 때 일본은 한국사의 뿌리를 말살하기 위해

 단군역사와 야마타이국에 관련한 역사를 말살,변조하는 것을 최초의 과업으로 삼았다.


 일견(一見) 조선 민족의 역사를 탈취하고 그 혼을 고갈(枯渴)시킨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동시에 일본민족의 뿌리까지 말소하여,

장차 일본제국의 붕괴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분서이기도 했다”고 밝혔다.


☞ 광복 후 발간된 <제헌국회사>와 문정창(文定昌) 씨의 저서 <군국일본조선강점36년사>에서는

일본이 1910년 8월 한국을 폭거적이고, 불법적인 강제병합 이후 1911년 12월까지 1년 2개월 동안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 단군조선 및 고대역사서 등 51종 20여 만권 분서했다"고 밝히고 있다.


☞ 또 1938년 6월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에서는

 한국사 조작 편찬 배경을 말하고 있으며,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 동안 압수 분서한 사료가 무려 4950종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상시변호사 인터뷰 내용 조선일보 1985.10.4   ▲조선일보 1986.8.17



당시 이들이 조작한 역사는 수없이 많지만 ‘역사조작’ 카테고리에서 밝힌 것 외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호소카 유지著 ‘일본에게 절대 당하지 마라’ 참조)



1. 청일전쟁이 끝날 무렵 일제는

 '조선의 신'은 일본의 시조신인 아마테라스의 남동생 수사노오(素 鳴尊)라고 대대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국 통치를 위한 대선전이었으며, 엄청난 픽션 창작이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수사노오는 난폭했기 때문에

 하늘의 나라 다카마가하라(高天原)에서 추방당하여 신라에 내려와 거기서 살았다고 한다.

일본서기의 기술에 입각하여 수사노오가 한민족,

 나아가서 만주민족의 조상이라는 주장이 당시 활발히 퍼졌다.


 당시 일본은 수사노오를 한국의 신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이는 한국의 신이 일본의 신의 '동생 신'이였다는 이야기는 한국인을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해서 안성맞춤이었다.

일제는 당시 초등학교 역사교과서에 실어 한국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조선총독 고이소(小磯國昭)는 공개적으로 수사노오가 '한국의 신'이라고 주장했다.


“여기 반도 2500만의 원(原)민족은 틀림없이 수사노오의 후손입니다.

 과연 그렇다고 하면 아마테라스의 후손인 내지(일본) 민족과

 바로 뿌리가 같고 하나라는 것을 숨길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생각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오늘날 알 수 있는 역사상으로나, 그 후로도 피의 혼합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이지 43년(1910)의 성대에 아마테라스의 후손이신 메이지 일왕에 대하여

수사노오의 후손인 조선이 합방된 것은

신대 말기의 신사(神事)가 더욱 철저히 완성적으로 되풀이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뿐만 아니였다.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의 시조인 단군이 실은 수사노오였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다카마가하라에서 신라에 내려 온 수사노오는 실은 단군이었다는 이야기이다.

단군은 일본으로 건너가 시마네현의 수사(須佐)라는 데에 상륙하여 잠시 거류했으므로

 단군을 수사의 사나이(=수사노오)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주장이 사실처럼 퍼졌다고 한다.


2. 그리고 일제는 만주를 삼키기 위하여 1930년대

오야베 젠이치로(小谷部全一郞)라는 작가가 징기스칸을 일본인이라고 주장했다.

 1192년 가마쿠라(鎌倉)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의 남동생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經)는 작아도 용감한 미남무사로서 일본인들에게 지금도 인기있다.


그는 친형인 요리토모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오야베는 "요시츠네는 형에게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몽고로 도피하여 징기스칸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만주식민지화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그리고 오야베는 만주국의 황제였던 부의(溥義)도 일본인의 자손이라는 과대망상적인 픽션을 만들어 냈다.

 만주 민족의 피에는 일본인의 피가 흐르고 있으므로

 만족민족은 일본인과 동족이며, 동족끼리 하나가 되는 것은 당연한 도리라는 논리다.


3. 서양을 이기기 위해 만들어 낸 조작도 있다.


놀랍게도 서양인들이 신이라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

일본 혼슈(本州)의 북단에 위치한 아오모리(靑森)현의 신고오무라(新鄕村)에 있다.

 이곳은 지금 관광명소로 되어 있다.

그리고 2000년 전에 이스라엘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자는 예수가 아니라

그의 남동생인 이수키리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당시 예수는 일본에 도피해 106세로 죽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일본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1935년에

이바라기(茨城)현 기타이바라기(北 茨城)시에 위치한

고오소코(皇祖皇) 大신궁 안에서 발견된 다케우치(竹內) 고문서에 쓰여 있다.

고문서에 예수의 무덤이 아오모리현에서 발견될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 내용대로 예수의 무덤 위치가 일치했으니 만들기는 잘 만들어진 정교한 픽션이다.


그뿐만 아니라 1936년에는 일본어로 쓰인 ‘예수 그리스도의 유서’마저도 발견되었다.

 그 유서 내용 속에 일왕을 찬미하는 문구가 쓰여진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일제는 서양정신의 중심인 기독교까지 조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1919년 8월 12일 단군조선.백제.가야 등 한국 고대사를 말살시키는데 앞장섰던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이어 문화정치를 빙자하여 부임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사진)는

 1922년 '조선사편수사업'을 진두 지휘하면서 소위 '교육시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먼저 조선사람들의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선조와 선인들의 무위(無爲),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사적,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이 말은 일제가 역사조작과 병행하여 한국인들에게 자학사관을 빠지도록 강제 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황국사상(皇國思想)과 국가신도(國家神道)


일본은 천년 이상 사무라이 집단 즉 막부가 지배했었다.

 막부는 일왕의 존재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그것은 막부의 입장에서 보면 일왕도 막부를 위협하는 가상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메이지 쿠데타 이전 일본국민들의 99%가 일왕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막부는 일왕가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일부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일왕을 최고급 보석 '교쿠(玉)'라 하면서 조작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쿠데타 이후이다.

 쿠데타 세력들은 그들의 무능력과 이중성을 숨기기 위하여 일왕이라는 얼굴마담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확대 재생산되고 조작된 것이 ‘황국사상’과 ‘국가신도’이다. 




     ▲메이지 일왕

○황국사상(皇國思想)


일본인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지만 일본인들 정신세계 밑바탕에는

 한민족을 무시해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침략적 이데올로기가 웅크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황국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황국사상은 일본이 임진왜란을 비롯한 수많은 침략을 자행할 때마다

면죄부를 주었다. 


 황국사상은 바로 조작된 ‘기기(記紀)-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출발한다.


기기’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에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꺼꾸로 일본 징구왕후가 한반도를 점령했다는 식으로 조작해 놓았다.

 일본은 ‘기기’에서 신라에 패했던 역사를 은폐시키고

 역사를 조작해서라도 신라를 언젠가는 앙갚음하겠다고 다짐이라도 하듯 거짓신화를 창조해 낸 것이다.


그리고 후세의 권력자들은 소설과 같이 조작된 ‘기기’를 번번이 예언서인 양 이용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한반도를 강력하게 무시함으로써

일본이라는 하나의 덩어리로 힘을 모으려고 꾸몄던 소설이 결국은 역사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렇듯 일본열도를 평정하려는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던 '기기'는 한반도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1300년 간에 걸쳐서 일본인들의 피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픽션처럼 조작된 ‘기기’가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한반도 침략을 죄의식없는 사상적 원천이 되었다.

 메이지 쿠데타 세력들이 이를 정략적으로 확대 재생산하여 

 일본국민들의 정신세계에 침투시켰다는 것을 일본국민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메이지 쿠데타 세력들은 그들의 치부를 숨기기 위하여 황국사상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조작된 기기를 십분 이용했다.

이들은 조작된 ‘기기’를 이용하여 ‘일본’이란 세계 전체를 뜻한다.


 ‘신들의 시조이자 천계의 모든 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가 일본에서 태어났다. 아마테라스의 자손인 진무일왕이 아마테라스의 뜻에 따라 일본에 나라를 세웠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역성혁명이 일어났지만

 일본은 그의 아들들이 지금까지 다스리고 있는 감히 어느 누구도

 일왕의 자리를 넘보는 자가 없었던 만세일계의 나라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다.

따라서 신의 나라 일본을 다스리는 만세일계의 일왕이 영원히 지상세계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아마테라스의 신칙이자 예언이다’라고 조작하였다.


이것이 내포하는 뜻은 아마테라스의 자손인 일왕(천황)이 지구 전체를 지배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평화철학이 전혀 없는 명백한 침략이데올로기이다.

이로 인하여 역사치매에 걸린 우매한 일본인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침략과 학살을 일삼았다.

지금도 이시하라 도쿄도지사와 같은 정치지도자들이 인종차별적 발언이나 역사조작을 일삼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인가가 급상승하는 것은 이러한 조작된 사상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국가신도(國家神道 State Shint)


민족의 신화와 전설.역사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여 

 사상으로까지 만드느냐에 따라 민족의 장래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가 때에 따라서는 집단행동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고,

국가와 민족 전체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열쇠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일본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다.

 '야오요로즈노 카미(八百万 神)'

즉 '일본에는 8백만 신들이 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신들이 득실거리는 섬이다.

신도에서는 무엇이라도 믿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신으로 모실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착안한 메이지 쿠데타 세력들은 황국사상에 의한 ‘국가신도’라는 것을 만들었다.

국가신도라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그들의 허망한 정치력을 숨기기 위한 방편으로 일왕을 전면에 내세우기 위하여 만들어 낸 최대의 조작 걸작품이다.


국가신도는 조작된 ‘기기’를 경전으로 삼고

그곳에 등장하는 일본인의 조상신(始祖神)이라고 조작되어 있는 아마테라스를 신봉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직계자손이라고 조작한 일왕을

유일하게 ‘아라히토 가미(現人神 살아 있는 신)’라고 신격화하여 숭배하는 종교다.


메이지 쿠데타 세력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에니메이션의 왕국답게 ‘국가신도’를 더욱 화려하게 포장했다.

 즉 아마테라스는 전세계 신들 중에서 최고 신이다.

그러므로 천계의 지배자는 부처나 예수,마호메트가 아니라 바로 아마테라스이다.


아마테라스가 천계의 모든 신들을 지배하고 있듯이

지상세계에서도 아마테라스의 직계자손인 일왕이 전 세계의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아마테라스의 신칙이자 예언이라는 것이다.

국가신도의 주장대로라면 다른 모든 종교는 국가신도 아래에 위치하므로

 어떤 종교를 믿어도 아마테라스에게 경배해야 하며 아마테라스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지구 전체는 일왕이 다스리는 일본이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작된 국가신도는 1945년 패전과 함께 폐지되었지만 1868년 메이지 쿠데타 때부터

 아시아침략전쟁 패전 때까지 일제의 국가주의적 공식 국교였다

. 1889년에 제정된 메이지 헌법은 ‘신교의 자유’를 보장했기 때문에

 메이지정부는 국가신도를 법적으로 국교화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칙령 12호를 통해 국가신도를 모든 종교를 초월한 교육의 시초로 정했다.

 따라서 신사 참배를 모든 일본인의 애국적인 임무로 간주하고,

그리스도교?불교 신자들도 무조건 참배토록 강제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역대의 일왕들은 대부분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써는 하나의 농담으로도 먹히지 않지만,

국가신도에서는 일왕은 '살아있는 신'이고 일본국민은 신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행복이 없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신민으로서의 가장 훌륭한 행동은 왕실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렇게 조작된 국가신도는 국가이념으로 삼아 개인의 목숨까지도 희생하도록 강요하였다.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그들의 허망한 정치력을 숨기고,

그들로 향한 국민들의 칼끝을 외부로 돌리기 위하여 ‘일본은 신의 나라다’,

‘일왕은 살아있는 신이다’라고 조작한 국가신도는 평화철학이 완벽하게 빠져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조작된 역사서 ‘기기’를 국가신도의 경전으로 삼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기기’는 한반도에서 쫓겨난 것에 대한 반발심에서 역사를 조작해서라도

 한반도를 굴복시키고 싶은 심정에서 출발한 한반도 경시.

침략으로 일관된 완벽하게 조작된 역사서가 아니던가.


여기에 더해진 것이 기독교의 성전개념이다.

즉 기독교 국가가 저지르는 전쟁은 명분상 악을 물리치는 성전이라고 하듯이

 3류 사무라이들은 전쟁이 신의 뜻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서양에는 마키아벨리즘적인 현실주의에 맞서

기독교를 비롯한 이상주의라는 상반되는 두 개의 이념이 병존해 왔다.

중국에서도 손자병법이라는 현실주의에 맞서 불교와 유교라는 이상주의가 공존해 왔다.

평화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한반도에서는 손자병법이라는 현실주의가 철저히 외면되었지만.

 이들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해 왔다.


 즉 이들 종교들은 지난 2000여 년간 인간사회의 도덕적, 윤리적인 결함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해왔다.

약육강식의 사고방식을 억제시키고 전쟁에 의한 인간들의 잔인함을 견제하여 사람들을 퇴폐로부터 구하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종교들은 수천 년의 시공을 넘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끊임없이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메이지 쿠데타세력들이 조작한 국가신도는 침략주의적 사상을 배경에 깔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 종교를 철저히 탄압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전국시대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불교를 탄압했듯이 메이지 세력들은 

 절이라든가 불상을 파괴하는 폐불훼석(廢佛毁釋)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윤리.도덕적 사상을 강조하는 불교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기독교는 일본 땅에서 아예 힘을 발휘해 본 적이 없다.

일본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이 16세기였는데 17세기 쇄국정책과 함께 기독교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기독교도들은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다.

메이지 시대에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지만

기독교를 받아들이면 서양인들의 정신적 노예가 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기독교 신자는 그다지 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조작한 국가신도는 

 평화철학이 완벽하게 빠져있으므로 인간의 폐퇴를 막아주지 못했다.

도덕주의가 상실되자 부국강병을 외치던 메이지 쿠데타 세력들은 군국주의를 선택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사무라이 국민성과 결합하여

일본의 지배권이 전 세계로 확대시켜야 한다는 침략 국가로 아무런 의심 없이 돌진해 나아갔다.


군국주의는 침략과 학살을 업으로 하고 전쟁을 생활화하는 것을 말한다. 

 군국주의란 원래 야만의 유품으로서 분명히 문명주의와는 정반대 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유교에 의한 평화철학을 표방한 도쿠가와 막부에 억눌러져 있던 비열한 사무라이들의 침략 침탈

 야만의 특성을 되살려 놓았다.

군국주의는 만세일계의 왕이 다스리는 신의 나라라는 신화에 집착하여

 침략을 당연시하고 타민족을 비하 멸시하는 식민정책을 펴왔다.


군국주의는 아시아 여러 민족에 대한 침략 정복에 대해서 아시아 민족의 해방전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사명감을 불러일으키듯이

일왕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최고신의 ‘신칙’이자, ‘신의 뜻’이라면

신자들에게 절대적이며 광기 넘치는 사명감을 불어넣어 주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렇게 국가신도에 물든 일본인들은 침략을 일삼으면서

기기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여 전쟁터의 참혹한 행위를 다음과 같이 합리화하여 선동했다.


일본군의 전투행위는 탄환과 폭탄에 의한 아시아민족에 대한 정화(淨化)행위이다.

-----민족황화(民族皇化)란 ----대동아권에 아마테라스를 출현시킨다는 뜻이다.


 아마테라스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전에 불제(?除=속죄)와 재계(齊戒=음식.행동을 삼가하여 심신을 깨끗이 하는 행위)라는

 고행이 있어야 심신을 깨끗이 할 수 있다는 것은 고전에 기술된 구절을 보아도 분명하다.


그럼으로 아마테라스를 대동아민족 앞에 출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심신을 정화하기 위한 불제와 재계라는 고행이 필연적이며,

 그들의 불결함이 깊고 추하면 추한 만큼 맹렬한 정화가 요청되는 셈이다.

여기서 탄환과 폭탄, 어뢰에 의한 맹렬한 정화라는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이렇게 전투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부여함으로써

식민지 국민이라든가 전쟁터에서 이뤄지는 아무리 참혹한 행위라 할지라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괜찮다고 인간의 양심을 마비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를 침탈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일본국민들을 세뇌시켰다.


"우리 대일본제국으로 말하면 단일하고 순수한 혈통이 천만대를 두고 이어져온 아름다운 나라다.

 그에 비할 때 이른바 저 한국 놈들은 어떤가.

놈들은 우선 생리학적으로 열등하다.


혈액만 하더라도 한국 놈들의 피는 ‘거무칙칙하고 더럽다.’

그렇기 때문에 이조 500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당쟁이 일어나 수많은 인명이 살상됐지만

 나라 꼴은 늘 엉망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한국 놈들은 유전인자 자체가 불순하고 열등하다. 

 따라서 놈들에게 밝은 미래란 있을 수가 없다.

오직 일왕폐하의 자애로운 품속에 있을 때만 그들은 행복을 바랄 수 있다."

 

 

화폐로 바라 본 일본


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생전 유명한 일화 한 토막.


그는 1971년 현대조선소 설립 자금을 빌리기 위하여 영국으로 갔다.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으로써 국제적 신뢰가 지금같이 않았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영국 은행은 "뭘 믿고 당신에게 돈을 빌려주느냐"며 냉담했다.

 그러자 정 회장은 당시 사용하던 500원짜리 한국 지폐 한 장을 꺼내 이들에게 보여줬다.

 "자. 이 지폐에 그려진 그림은 철로 만든 거북선이요.

철갑선은 한국이 세계최초이며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서 만들었소."

정 회장은 이 말 한마디로 돈을 빌릴 수 있었고 선박도 수주하였다.


화폐는 그 나라의 얼굴로 통한다.

 화폐 도안 소재로써는 보통 인물과 자연 풍경, 상징물 중 하나가 선택된다.

 그 때문에 돈에 새겨진 도안은 그 나라의 역사.문화.풍습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화폐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인물이다.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 국가의 발전과 생성에 크게 기여했거나,

 높은 단계의 철학으로 국민들을 살찌우게 한 인물들이다.


 미국은 예외 없이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건국과 관련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국민들에게 존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화폐만 보더라도 1만원 권에는 세종대왕,

5천원 권에는 율곡 이 이,

1천원 권에는 퇴계 이 황,

100원권에는 이순신장군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백성들의 가르침에 앞장서서 한글을 창제했거나,

 학문과 평화를 사랑하고 도덕적으로 한줌의 부끄러움이 없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화폐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일본화폐에 그려져 있는 인물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1만엔 권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4~1901),

 5천엔 권 니토베 이나조(新戶渡稻造, 1862~1933),

 1천엔 권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1867~1916) 등은 메이지 시절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총칼로 정권을 찬탈한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에게 학살과 침략 등

저주의 굿판을 벌이도록 독려했던 자들이다.

 그리고 국민들을 죽음의 나락으로 인도한 비열한 3류 사무라이의 대표적인 자이다.


○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일본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1만엔 권에는 쇼토쿠(聖德)태자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쇼토쿠는 고구려 승려 혜자(慧慈)를 스승으로 모셨고,

일본최초로 율령체제를 만들었다는 7세기 초 일본왕실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백제계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 있자 80년대 일본정부는 후쿠자와로 슬쩍 대체시켰다.

후쿠자와가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1만엔 권에 등장할 정도라면

과연 그는 일본에서 어떤 인물인가?


후쿠자와는 메이지 시절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게이오대학의 전신)을 설립하고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간했다.

 그리고 1872년 '학문의 권장 <學問のすすめ>’이라는 책 머리말에서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라는 말이

신선한 충격을 주어 7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당시 일본 인구가 3천만 명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읽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는 일본에서 ‘일본의 정신적 지주’,

‘일본의 볼테르’, ‘근대일본의 계몽사상가’ 등 화려한 수식어가 붙어 있다.


하지만 그는 '전국 인민들의 뇌리 속에 국가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자’라고 주장하여

 일본열도에 개인의 인권을 완전히 몰살하는 국가지상주의가 탄생토록 독려했다.


 이것은 평화철학이나 도덕적으로 전혀 무장되어 있지 않은 3류 사무라이들에게

 정권 찬탈에 대한 이론적 도피처를 제공했다.


즉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에게 침략과 학살에 대한 환상을 주입시킨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일본인 특유의 카멜레온적 2중 플레이,

즉 속(혼네-本音)과 겉(다테마에- 建前)을 완벽하게 숨기는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무서운 일본국민성을 만드는데

 일등공신이었고, 오늘날 일본 우익의 태두이자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자이다.


당시 후쿠자와는 ‘서양은 표면적으로는 사랑을 내세운 기독교 국가이지만

본질은 타국을 침략하려고 노리는 살인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도쿠가와 막부가 일본열도에 국가지상주의에 반대되는

 인본주의 철학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도입한 유교를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일본인의 의무는 오직 이 코쿠타이(國體)를 유지시키는데 있다.

 코쿠타이를 유지한다는 것은 자국의 정권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권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는 인민의 지력을 증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 많은 방책을 생각할 수 있으나,

지력발생에 있어서 가장 급하고 필수적인 것은 옛날의 습관에 빠져 있는 악습을 일소하고,

서양의 문명 정신을 채택하는 일이다.

음양오행의 악습을 일소하지 않으면 궁리의 길로 들어갈 수가 없다”


이 말은 그가 얼마나 유교를 문명의 적으로 간주했는지 잘 대변하고 있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장려했던 유교의 높은 정신세계를 매장시켜,

 그 결과로써 평화적인 도덕관념을 마비시키고 일제가 침략 지상주의로 치닫는데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또 후쿠자와는 유길준.김옥균 등

조선의 급진개화파와 교류를 하면서 이들을 뒤에서 조종내지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러자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후쿠자와는 김옥균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리고 1885년 지지신보에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그 유명한 ‘탈아론(脫亞論)’을 썼다.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흥하게 할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거기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하고,

지나(중국) 및 조선 역시도 이웃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대우할 필요 없이

 서양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대우하면 된다.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나쁜 친구(惡友)와 친해져서 함께 악명을 뒤집어 쓸 이유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들을 멀리해야 한다”


여기에서 ‘서양사람들의 방식대로’가 뜻하는 것은

‘영국인들이 인도인들을 살해하면서

 동물로 착각하여 죽였다라고 변명했듯이

 점령지의 사람들을 동물과 같이 죽여도 상관없다’는 것을 말한다.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악우(惡友)’ 라고 비하한 것은

 수천 년간 일본의 스승인 한반도와 중국 諸 아시아 국가들을 말한다.


 후쿠자와는 여기에서 일본인들에게 몸은 비록 동양인이지만

생각과 행동은 서양인이 되어 일본은 아시아에서 탈피하여 서구와 진퇴를 같이하라고 주창한 이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은 철학이 없는 3류 사무라이들을 더욱 광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후쿠자와의 이러한 역사관은 역사조작 쓰레기장의 개(犬)인 이중인격자임을 증명한 것이다.


1885년에는 ‘일왕께서 직접 징벌 나가실 준비는 되었는가?’,

 ‘조선만은 정리되어야’, ‘아직 만세를 부를 때가 아니다’,

 ‘일본병사들,재조선 일본인들의 안부는 어떠한가?’,

‘조선 백성들을 위해 조선의 멸망은 축하할 일’,

 ‘조선의 멸망은 조선의 피할 수 없는 대세다’라는 논문을 통해

조선을 '요마악귀(妖魔惡鬼)의 지옥국' , 즉 ‘야만 이하의 나라’ 라고 혹평하며

 조선을 맹렬히 침공하도록 선동한 자이다.


그리고 1895년 간악한 일제가 명성황후를 야만적으로 시해하는 사건이 터지자

세계의 비난 여론을 앞장서서 무마한 자이다.

그러면서 그의 많은 제자들을 한반도 침략의 선봉에 서도록 독려했다.


또 그는 1894년 일제가 풍도 앞바다에 있는 청나라 함대를 비겁하게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된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7월4일 지지신보에 다음과 같은 사설을 통해

청일전쟁을 ‘문명의 선전’이라고 하면서 전쟁을 선동한 주전론자(主戰論者)다.


"문명류(文明流)의 개혁을 기뻐하지 않는 태도는 미개인의 일상사로서

 완고한 백성을 지도해 문명의 문으로 들어가려는 데에는

 병력으로써 임하는 방법 이외는 달리 좋은 것이 없다."


1894년 8월5일자 사설에서는

 "이번의 전쟁은 일본이 조선에 문명류의 개혁을 촉구하고,

자립과 스스로 교제할 수 있게 해주려고 하는데,

저 지나인(중국인)은 문명류주의에 반대해 종종 방해할 뿐 아니라 

 병력을 동원해 우리에게 반항할 뜻을 표하고,

 더군다나 그로부터 실마리를 풀려고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후쿠자와의 주창들은 서양을 추종하되

평화철학이 깃든 기독교를 멀리하여 

 비정.잔혹한 침략과 억압하는 기술만 배우고 습득해서

하루 빨리 구미를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후쿠자와의 영향으로 일본인들을 정신적 공황에 빠지게 됐다.

그의 이러한 주장들은 일본인들이 인간 도살자가 되어

한반도.중국 등 여러 아시아국가들을 피의 광풍으로 휘몰아 넣는 단초를 제공했다.


오늘날 일본은 이렇듯 편향된 사고를 가지고,

전쟁과 학살을 독려한 후쿠자와를 계몽사상가라 칭송하면서 1만엔 지폐에까지 등장시켰다.


일본열도에는 그렇게도 화폐에 넣을 인재가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가재는 게 편이라 오늘날 일본인들의 편향된 시각을 반영한 것인가?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칼로 억압하여 심어놓은 비판의식 없는 일본 국민성의 대변인가?

참으로 한심스러운 섬나라 일본이다.


○ 니토베 이나조(新戶渡稻造)



5천엔 권의 니토베 이나조(新戶渡稻造, 1862~1933)도

메이지 시대 3류 사무라이의 주구(走狗)로 후쿠자와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는 1906년 발표한 <말라 죽은 조선>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조선인의 생활 풍습은 죽은 풍습이 되었다.


그들은 민족으로서의 삶의 기한이 다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국민적인 삶의 진로는 이미 지나버렸다.

죽음은 이미 반도를 지배하고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1910년 8월 폭거적인 한국 병탄에 즈음하여 

 ‘다음으로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조선합방이다.

 이것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천재일우의 기회인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일약 독일. 프랑스. 스페인보다 더 넓은 면적을 갖게 된 것이다


. 어쨌든 지금의 우리나라는 유럽제국보다 더 대국이 되었다.

 여러분은 순식간에 큰 것이다. 한달 전의 일본과 지금의 일본은 천지차이다.

 이와 같이 대국이 된 이상 이제 예전부터 내려온 섬나라 근성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연설한

 식민지 예찬론자이자 전쟁을 선동한 자이다.




그리고 1천엔 권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도 제국주의에 오염된 자이다.


 [만주와 대한제국의 이곳 저곳],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등 그의 작품 곳곳에는

이웃나라들을 비하한 글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는 정로환(正露丸)이라는 약 이름을 러일전쟁 이후에는

 '러시아를 정복한다'라는 의미인 ‘征露丸’으로 바꾸어 사용한 자이다.


또 그는 러시아인을 ‘로스케(露助)’로 중국인을 ‘챤(チヤン)’으로 불렀다.

이는 러시아인과 중국인을 업신여기고 비하하는 말로써 그의 정신세계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메이지 정부에 대한 비판


한국에서는 바로 앞의 정권도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살아 있는 전직 대통령과 위정자들을 단호하게 비판하고 죄질에 따라 예외 없이 감옥에 가두기도 한다.

드라마에서는 어느 시대건 상관없이 모두 방영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에 대한 건전한 비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메이지 쿠데타를 일으킨 자들이 신의 나라, 살아 있는 신, 칙령, 역사 등을 조작하여

 결국 망국으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메이지 쿠데타 삼걸(三傑)이라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키도 타카요시(木戶孝允),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에 대한 재해석도

드라마에서 조차도 절대 등장하지 않는다.

일본은 이 점을 오히려 미화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 국민들의 건전한 비판이 형성되지 않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건전한 비판을 외면하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무자비한 살육과 강압에 의한 통치를 했던 사무라이 문화에 적응했던 것이요,

메이지 쿠데타를 일으킨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일본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아 심어준 열병에 의한 것이다.


또 일본열도에 독자적인 유구한 역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메이지 쿠데타는 밑으로부터의 시민혁명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일방적인 강압에 의한 지시 하달이었다.

따라서 밑으로부터의 변혁을 통해서 쟁취될 수 있는 시민적 법치민주국가의 이념과

합리주의의 과학적 검증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이는 결국 민권을 제압하고 국권 중심의 부국강병의 관료통치와

국수주의적 군사국가로 발전해 나간 전쟁국가체제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모순으로 가득 찬 쿠데타였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비판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또 과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심리 속에는 일본국가는

 항상 바르며 비판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존재’라는 인식이

 메이지 시절 조작된 역사관과 황국사관에 의거 완벽하게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메이지가 오늘의 풍요로움을 전해준 근대화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믿고 싶어한다.

지금도 전쟁의 결정이 국민을 위해 옳았는지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논하는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비판이 시작되면 근대화 시작이었던 메이지 쿠데타와 일왕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것이고,

 일본 근본 자체가 비판의 도마에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근현대사를 파헤쳐 나가는 일을 되도록 피해왔고 외면해 왔다.


오히려 건전한 비판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아시아 침략전쟁 막바지에 벌어졌던 오키나와 주민 대량 학살을 비판했다가 피소 당했고,

 前 나가사키 시장 모토지마 히토시(本島等)는

‘원폭은 일본이 받아야 할 천벌이었다’라고 전쟁을 비판했다가  테러의 대상이었다.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만든 메이지 시절 정부 정책에 비판을 가한 세력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극히 일부였다.


그 중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운동가로 알려진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는

‘일년 반’이라는 평론을 통해 메이지 정부의 정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민권은 최상의 이치이며, 자유평등은 대의이다.

 그 어떠한 제국주의라 하더라도 이러한 도의는 결코 멸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도리를 중국에서는 이미 맹자와 유종원(柳宗元)이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는 구미만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소인배, 마츠가타 마사요시(松方正義)는 멍청이,

 사이고 다카모리는 겁쟁이…..원로들 가운데에서는 선비다운 사상가가 한 사람도 없다.


 이토오 히로부미 이하 모든 원로들은

하루라도 빨리 저 세상으로 사라져 주는 것이 국가의 이익이 된다”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에서는 “제국주의란 소위 애국심을 가로로 하고,

군국주의를 세로로 해서 베틀 위에서 짜는 피륙과 같은 정책이 아니겠는가?”라고 혹평했다.

 또 ‘애국심’이라는 것은 배타적인 것으로 ‘야수적 천성이자 망령이고,

미친 듯한 열정이고, 허풍을 떠는 자랑이고, 싸우기 좋아하는 근성’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제국주의란 군비 확장을 촉진해서 ‘무기와 양식,

그 외의 군수 물자를 제공하는 자본가를 일확천금을 거머쥐는 갑부로 만들어 주게’ 되는데

, 이런 식으로 행해지는 ‘대제국의 건설’이란 것을 결국 ‘강도 및 살인 행위’라고 그는 단정지었다.


일제가 청일전쟁을 일으키자 그는

  ‘나는 단언하건대 제국주의 정부는 소수의 욕망을 위해 다수의 행복을 강탈하는 자들이며,

야수적 감정을 위해 과학적 진보를 저해하는 자들이며,

인류의 자유와 평등을 압살하고 사회 정의와 도덕을 말살하고 세계문명을 파괴하는 도적의 무리이다.’라고

 메이지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 시인 요사노 아키코(與謝野晶子 사진)는

전쟁터에 나간 동생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詩

[아우야 절대로 죽지 마라]에서 다음과 같이 제국주의자들과 일왕을 싸잡아 비난했다.


[아우야 절대로 죽지 마라] 제3절


아우야 절대로 죽지 말거라
그(일왕)는 나아가 싸우라 하고
정작 그(일왕)는 전쟁터에는 나오질 않는구나
피 묻은 유품만을 남기고
짐승처럼 죽으라 하는구나
죽는 것이 대장부의 명예라 하는구나
일왕의 마음이 깊다면
이를 어찌 생각하실는지.


○ 우에키 에모리(植木枝盛)는 “전쟁을 천하의 대죄라고 하는 이유는

 전쟁은 반드시 천지 간에 귀중하고 영적인 인명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인민들에게 사적인 싸움을 금지하고 있는 것과 같이

 세계 각국 역시 서로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해서 마치 한 나라인 것처럼 되어야만 한다”라고

 메이지 정부를 비난했다.


 그리고 1876년 ‘원숭이 군주(猿人君主)’라는 글을 통해

메이지 쿠데타를 일으킨 군주와 실세들이

언론통제를 통하여 일반국민들을 말 잘 듣는 원숭이로 만든다며 이들을 ‘원숭이 군주’라고 비판했다.

 

맺음 말



일본은 만화와 에니메이션의 천국이다.

일본만화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도 애독한다.

 아이니컬하게도 치밀하다는 일본인들이 만화를 즐기는 낙관주의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이는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역사를 조작하여

 일본인들 마음속 깊이 심어놓은 진무일왕 신화에서 이어받은 것이다.


이들이 조작한 일왕이란 ‘신의 자손’이며

 ‘목숨 바쳐 왕에게 절대 충성의 길이 삶의 보람’의 대상인 것이다.

 일본은 위로부터의 잘못된 선택을 하여도 여기에 순응을 하고 있다.

조작된 신의 나라가 그러했고,

히로히토의 잘못된 아시아 침략전쟁이 그러했고, 야스쿠니 신사가 그러했다.


일본은 헌법 제9조를 위반하면서까지 군대를 보유하고 있고,

 헌법을 위반하면서까지 2001년 10월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해상 자위대를 인도양에 파견했다

. 또 헌법을 위반하면서까지 2003년 이라크에 

 육해공 자위대를 파견시키는 과감성을 보인 고이즈미의 잘못된 선택이 그러했다. 

 

▲ 살이있는 신으로 굴림했던

히로히토

이제는 자국 헌법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일본이 

안전보장이사국에 진출하고자 한다.

 이에 4200만 명에 이르는 세계인들이 일본의 안보리 진출에 반대하는 서명을 하였다. 역사조작을 일상사로 하여 이웃나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는 나라가 세계의 경찰국가 되겠다고 나선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소한의 도덕적 양심마저 결여된 일본이 돈이면 인간의 마음도 정신도 살 수 있다는 오만 방자한 생각으로 세계를 우롱하고 있으니 삼척동자도 웃을 일이다. ‘헌법을 무시할 수 있는 나라’,

‘무력을 제멋대로 행사할 수 있는 나라’.

참으로 뻔히 보이지 않은가.


잔꾀는 일본몽키와 같이 가증스러울 정도로 부리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은 일본에게 진정한 과거 청산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과거 역사를 바로 직시하고 있다고 항변하고 있다.

 과거 역사를 쳐다보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으면서 또 다시 역사조작까지 하는 일본을 보면서

 한국인과 중국인 등 아시아인들은 더욱 분노하는 것이다.


한국은 근대기에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표현할 수도 없고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침략행위에 대한 진정한 보상과 사과도 받지 못했다.


 더 기가 막히는 일은 고통을 준 일본이 오히려 더 잘 먹고 잘 사는 현실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매우 복잡한 심정을 갖지 않은 수 없다.

일본으로 인하여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이 됐고,

 분단된 남북에는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다.

우리에게는 동족 상잔의 비극이었지만 일본에게는 엄청난 부를 안겨 주었다.

전쟁특수 득으로 일본경제가 크게 성장하여 오늘날 세계 경제대국이 되었다.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정치고문이었던 윌리엄 J 시볼드는

“일본 경제가 한국전쟁으로 뜻하지 않은 대박을 터트렸다”고 말했다.

 1800명을 거느린 마쓰시다(松下)의 사장이었던 마쓰시다 고노스케(松下幸之造)는

공장 폐쇄를 선언한지 2개월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했고,

 前 총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천우신조'라고 말했다. 


한국전쟁은 패망한 일본경제 재건에 일등공신이었다.

 이러한 일본을 바라보면서 한국인들은 도참설(圖讖說)과 주역(周易)을 내세워

일본열도가 바다 속으로 침몰할 것이라는 각종 예언을 믿는다.

이것은 갖은극악무도한 악행을 일삼았음에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이 싫어서가 아니겠는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현재의 교훈으로 삼아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데 중요한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성하지 못하는 일본은 현대에 와서도 잘못된 역사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후쇼사가 발행한 조작된 ‘새 역사교과서’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역사를 배운다는 의미는 현대의 기준으로 과거의 부정이라든가

 불공평성을 심판하거나 고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각 시대에는 그 시대의 특유한 선악관이 있었고 특유한 행복이 있었다.

  ---- 사람,민족,시대에 따라 사고방식이라든가 느끼는 방식이 각각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간단히 하나의 사실을

선명히 그려내는 일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민족에 따라 각각 차이가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라의 수만큼 역사가 별도로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

역사란 고정적이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역사에 현재의 선악 관념을 맞춰 현재의 도덕으로 심판하려는 재판의 장으로 만들지 말자.”


 역사인식에 관한 한 화해의 길은 분명 열려있다.

그것은 일본국민들이 메이지 잔당들이 심어 놓은 역사조작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신의나라를 거부하고 신의 자리에서 내려온 일왕과 같이 호흡해야 한다.


이웃과 싸움을 자초하여 일본을 파탄의 나라로 이끄는 정신 나간 정치인과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일본의 조상과 근본.역사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많은 국민들이 이를 인지할 때 일본은 진정 꽃보다 아름다운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왕의 더 높은 차원의 역사적 도덕적 양심적 선언도 필요하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한일 간의 미래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일본이 반성하게 하려면 한국은 일본에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

국가 간에는 대등한 관계에 서 있어야만 진정한 동반자 관계를 구축할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강한 힘만 신봉하는 사무라이의 나라 일본인들은 한국에 대해 머리를 숙일 것이고,

과거의 역사적 진실에 대해서도 제대로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출처: http://blog.daum.net/hearo9mars/56920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