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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94
삼국사를 반도에 가둔 역사무지 종지부 찍어야
김유신 활동무대가 반도라면 그 사실을 밝혀라
그러나 김유신은 대륙에서 성장했고 대륙에서 활동했다. 서화(西華) 몽성(蒙城)의 남북(南北)에는 김유신(金庾信)시대 지명이 19개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해서도 반도가 될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김유신은 반도가 아니고 대륙 사람으로 그 조상부터가 대륙에서 나서 자랐다. 김유신의 조상의 묘(墓)도 다 대륙에 있고 김유신 자신의 무덤도 대륙에 있다. 따라서 반도의 이야기는 다 허구로 김유신이 대륙의 사람이란 것은 지난 11월 24일에 이미 다 밝혔다. 근대 조선이후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은 말도 되지 않은 ‘반도사관’으로 9세기 이전 즉, 삼국시대의 우리 백성도 민족도 우리 동족이 아닌 모순된 역사로 만들어 가르치고 있다. 단군(檀君)과 광개토태왕도 반도 밖의 왕이니 우리와 상관없는 것으로 침입자로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웃기는 가관의 사관이다. 우리가 다민족(多民族)인데도 일제가 단일민족(單一民族)이라해 반도 밖의 선비족이나 여진족이나 몽골족은 우리와 상관없는 오랑캐로 만들었다. 일제가 만든 사관(史觀)은 모순되는 웃지 못 할 왜곡된 역사를 만들어 우리 역사로 둔갑시켜 서 중국 「동이전」을 반도에 맞추어 9세기 이전 역사를 숨기고 있다. 또한 1986년 4월 독립기념관법을 만들어 ‘광복기념관’이 아닌 ‘독립기념관’으로 한 것도 우리가 나라와 역사가 없었던 민족인 것 같이 되고 있다. 단어 하나라도 제대로 잘 선택하여 하자가 없도록 해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동이전(東夷傳)」은 황해 서쪽 대륙의 기록임에도 대륙과 반도가 모두 우리의 민족으로 기록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한반도에 맞춘 조립식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너무나 잘 알려진 김유신이 반도사람이라면 그것을 입증해줬으면 한다. 김유신(金庾信)은 대륙의 사람으로 반도에 없었다. 그의 행적이 모두 대륙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활동무대는 대륙에만 있다. 주로 서화(西華) 항성(項城)의 주위에서 활동했다. 반도식민사관자들은 김유신의 활동무대가 반도에 있다고 하는데 이를 밝히고 말해야 할 것이다. 중국의 고지도와 송나라 때 소동파(蘇東坡)가 만든 우적도(禹跡圖)에도 삼국시대의 지명(地名)이 대륙에 나와 있어서 「동이전(東夷傳)」을 한반도로 옮길 수 없는 것임에도 한반도에 맞춰 역사를 왜곡시켜 우리민족을 이질화시켰다. 한심하게도 이에 따르는 자가 반도식민사관자다. 오늘은 9세기 이전 역사를 기록한 유일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 나온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김유신 살던 대륙, 반도로 옮길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2000년 전 주(周) 때도 「삼국사(三國史)」 권(卷)46 지역인 유연제노오월(幽燕齊魯吳越)의 나라들이 있던 대륙에 우리가 있었다. 이는 중국사서 「남제서(南齊書)」 권(卷)58에도 명기(明記)되어 있다. 대륙의 동해안을 따라 기름진 땅에 우리가지배하고 살았던 영역(領域)이다. 역사기록은 거짓 없이 바르게 정립(鼎立)할 뿐이지 취사선택의 자료가 되어선 안 된다. 취사선택이란 전체를 믿을 수 없을 때 하는 일로서 믿지 못하는 이유를 분명히 제시하여 바르게 정립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역사된 왜곡은 수치(羞恥)스런 행위로 해선 안 된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역사를 왜곡시키고 부정하게 하고 있는데 극히 5세기 이전 기록을 부정하고 9세기 이전도 모르게 하기 위해 사서(史書)들을 불태우며 없앴다. 이는 수치로 알아야 한다. 그나마 동이의 유구한 역사에서 9세기 이전을 알 수 있는 기록인 「삼국사기」가 이를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 반도식민사관자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도 제대로 연구는 하지 않고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부정(否定)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 이들은 「삼국사기」 기록이 반도의 기록이 아니기에 부정하는데 이는 우리의 영역이 대륙 하남성(河南省)의 서화(西華) 동쪽에서 반도까지 하나의 민족임을 입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들이 다 반도가 아닌 대륙이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광대한 영역이고 백제가 황하유역에 있었던 것과 「삼국사기」만이 서화(西華) 동쪽의 왕 신라와 반도의 칸(干)신라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당(唐)영호징신라국기(新羅國記)」와 「거칠부국사(居柒夫國史)」 기록을 남겨서 두 신라가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그게 아니면 입증하면 된다. 칸(干)은 고구려의 지역통치자로 기록하고 있어서 광개토대왕비와 진흥왕비(眞興王碑)가 입증하고 있다. 반도의 칸(干)신라(동신라)는 503년에 고구려에서 독립했음을 말하고 있는데 김유신(金庾信)의 반도에 없었다. 있었다면 입증을 제대로 하고, 역사를 가르치라고 말하게 된다. 우리 역사를 제멋대로 왜곡(歪曲)한다고 되는 세상이 아니다. 지난날은 그렇다 치고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유구하고 위대한 역사를 바로 연구하고 바르게 가르쳐 주기를 바라지는 것이다. 김일연(金一然)이가 쓴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중국(中國) 25사(史) 동이(東夷)의 기록에서는 요(遼)의 동쪽인 동명(東明)·서화(西華)·항성(項城)·덕안(德安) 동쪽에 백제(百濟)의 수도(首都), 한성(漢城)과 웅진(熊津)이 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三國史記)」는 한성(漢城)에 대한 고고학적(考古學的) 기록(記錄)과 주위지명(周圍地名)을 남겼다. 즉 한수(漢水)와 하수(河水)의 황하(黃河), 숭산(崇山)과 연와(煉瓦)로 쌓은 성터와 하수(河水)의 제방(堤防)이 있어, 황하 유역에 백제 한성(漢城)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곳은 반도가 아니다. 반도에 김유신이 있었다는 분은 어디에 있는지 밝혀줬으면 한다. 또 웅진(熊津)은 대산(大山)이 있는데 이 대산을 태산(太山)·태산(泰山)·대산(垈山)으로 고쳐 왜곡하나, 대산 서쪽에 웅진(熊津)이 있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이곳도 반도가 아닌 대륙이다. 이곳을 반도로 옮길 수 없는 것이다. 이곳을 반도로 보는 자는 연구를 하고 말해야 한다. 사서(史書)에 나타난 동이(東夷)의 역사 반도식민사관자(半島植民史觀者)들은 우리의 대륙역사(大陸歷史)를 일제(日帝)가 조작(造作)하고 왜곡한 역사만을 믿고 반도역사(半島歷史)로 오늘날 까지도 우리 역사에 역적(逆賊)같은 추태를 보이고 있다. 세계의 저명학자와 중국의 사서(史書)까지도 대륙의 역사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 동이족의 영역(領域)이 서화(西華)중심의 남쪽 오(吳)나라와 월(越)이 있는 양자강 이남:최치원전(崔致遠傳):한서진번(漢書眞番)에서 북상하면서보면 남월지(南越地)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진번(眞番)도, 이곳에 있다. 우리가 배운 것과는 너무 거리가 있는데 사실이다. 또한 우리 역사에 나오는 지명들은 다 믿을 수 없게 변경하고 이동시켜서 알 수 없게 한 것을 그대로 믿고 있는 우리나라 강단학파의 역사는 허구역사로 믿을 수 없는 위사(僞史)인 것이다. 예컨대 계백장군의 5천의 결사대가 싸운 황산(黃山)은 중국 여러 곳에 있는데 이 황산(黃山) 하나를 우리나라에 가져다가 이곳에서 김유신의 신라군과 싸웠다고 동화(童話)같은 이야기다. 이 같은 말로 사기(詐欺)는 이제 그만해야 한다. 그 같은 억지 지금은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의자왕(義慈王)에 관해서도 강서성(江西省)·산서성(山西省) 등에서의 활동이 「신구당서」에 기록이 있고, 21대 개로왕(蓋鹵王)이 반도 아닌 대륙에서 활동한 것을 위시해서 기록들이 남아 있다. 고구려 5대 모본왕(慕本王), 21대 문자왕(文咨王), 28대 보장왕(寶藏王) 등이 「신구당서(新舊唐書)」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와 「북사(北史)」 등에 그 활동이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대륙이다. 역사를 왜곡하게 된 것은 사가(史家)가 아닌 김일연(金一然)과 사학자인 신채호가 우리 역사를 반도에 국한하는 그들 저서가 대륙이 아닌 반도에 맞춘데 있다. 이것은 「삼국사」 권46과 「남제서」 권58을 모르고 쓴데서 문제가 있다. 김일연(金一然)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東夷) 기록을 인용하여 환국과 배달국을 빼고 고조선을 국가 기원으로 하여 고조선 이전 상고사를 삭제한데 문제가 있다. 그는 소동파가 역사 왜곡을 위해 만든 우적도(禹跡圖)를 보고 한반도의 역사로 한 것 같다.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 역시 상고사(上古史)와 고대사(古代史)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점을 아니 둘 수 없다.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 역사는 마치 5000년 역사인양 말하고 헌법에도 한반도와 부속도서가 우리영역으로 해 애국가도 3천리로 한 것은 역사무지가 낳은 결과다. 이렇게 한 것을 보는 장안(長安) 중심의 한족(漢族)은 자기들의 기록인 「중국 25사」 동이기록을 숨기고 왜곡하기에 이른다. 우리가 상고시대부터 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하여 지배한 것을 숨기고 중국역사를 정립하면서 사기(史記)에서 당서(唐書)까지 우리를 동이민족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동이의 영역은 하남성 서화(西華)의 남북에 있는 덕안(德安)·항성(項城)·태원(太原)·은산(銀山)의 동쪽에서 해주(海州;금주 북쪽 고구려 장성상(長城上)까지 동이족(東夷族)의 각국(各國)을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에서 그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즉 역사시대인 배달국(倍達國時代)와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의자왕(義慈王)시대, 김유신(金庾信)시대 모두 서화(西華) 항성(項城) 동쪽에서 우리 동이가 활동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어느 사서(史書)에서도 동이각국(東夷各國)이 하남성(河南省) 서화(西華)의 동쪽에서 요하(遼河)의 서쪽까지 기록하고 있지만 반도에 동이(東夷) 국가(國家)가 있다는 기록은 없다. 단지 고구려별도(高句麗別都);(현 평양)과 자칭 무강왕(武康王);현 익산)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원(元)나라 때 쓰여 진 요사(遼史)의 일부에 만주와 반도의 신라(東新羅);칸(干新羅)를 기록했을 뿐이고 9세기 이전에는 서화(西華)동쪽에서 요하(遼河)까지를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5세기 이후 중국의 역사왜곡 상상을 초월 중국은 당(唐)나라 때부터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는데 상상(想像)을 초월하리만큼 엄청나다. 그것은 5세기 이전 백제(百濟)·신라(新羅)·왜(倭)가 반도(半島) 쪽에 있다고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닌 허구(虛構)로 진실이 아니다. 백제·신라·왜가 반도에 없었다. 이로 인해 11세기 이후 아시아인들은 9세기 이전 신라(新羅)·백제(百濟)·왜(倭)가 반도 쪽에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기에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중국25사동이」기록에서 그 위치를 살펴보면 확실히 들어난다. 즉, 왜(倭;위(衛) 경우 광개토태왕 이전부터 양자강(揚子江)이남에 있었고, 인물로서 소강(小康);(삼국지(三國志)에 나와 있고 일본 고대국가 왕이라는 히미코(卑彌呼)와 노자(老子)가 사기(史記)에 쓰여 있다. 진시황(秦始皇)의 불로초(不老草)를 구하러 간다고 진(秦)나라를 빠져 나온 서복(徐福)도 후한서(後漢書) 이전에 기록되어 있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나라 역사를 대륙에서 밀어내기 위해 제멋대로 조작하고 왜곡을 감행했다. 그것은 중국과 일본은 상고사가 없는데서 나온 소치이다. 지명(地名)으로는 회계(會稽)(삼국지,후한서), 담이(儋耳);남월(南越),주 애(朱崖);삼국지(三國志), 후한서), 단주(澶洲);후한서) 회계동야현(會稽東冶縣);이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다. 왜(倭)의 특징(特徵)은 문신(文身)을 하였고, 비단과 면(綿;목화)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후한서(後漢書)의 기록이다. 이후 당 태종시대(唐太宗時代)에 발간한 「남사(南史)」까지의 기록도 동일하다. 반도식민사관자들이 한반도에 있다는 한(韓)=마한(馬韓), 변한(弁韓)은 서화(西華)동쪽에 있었다. 특산물은 비단, 면(綿;목화)를 사용하였고 인물로는 기회(箕淮;準)이 있다. 한(韓)에는 50여국이 있었다. 그 중 백제국(伯濟國), 무녀(巫女)가 세운 히미코(卑彌呼)의 이도국(伊都國)과 남자가 세운 구노국(狗盧國)등이 있었다. 백제국(伯濟國)은 백제(百濟)로, 사로국(泗盧國)은 신라로, 왜(倭는 이도국(伊都國=邪馬臺國)과 구노국(狗盧國)이 있었는데 670년 대만(臺灣)에서 일본(日本)으로 발전되었다, 이 나라들 모두가 대륙에 있었다. 양서(粱書)에서 당서(唐書)도 신라 백제는 석문(石門), 대방(帶方), 항성(項城;西華南)이 하남성(河南省)이고, 덕안(德安), 진평이군(晉平二郡)이 산서성(山西省)이라 기록하고 있다.(新舊唐書) 한편 고구려는 247년 이전에 하북성 서안평(西安平;贊皇)까지 진출하였고 5세기 이전 안휘성(安徽省)의 섭라(涉羅;흡(歙)까지 진출하였으며, 49년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평정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三國志, 後漢書). 그런데 고구려(高句麗)가 진출한 안휘성(安徽省)의 섭라(涉羅;흡(歙)를 504년에 백제(百濟)에게 빼앗겼다고 기록하고 있다.(魏書, 北書). 위에서 보듯 「중국(中國)25사(史)」에 의한 동이(東夷)기록과 「삼국사기(三國史記)」기록은 분명한데 어찌해서 이곳을 반도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더욱이 광개토대왕시대 백제, 신라, 왜(倭)가 하남성(河南省)의 서화(西華)동쪽에 기록하고 있음에도 이를 숨기고 왜곡하고 있는 사학자(詐學者)들은 오늘도 우리역사를 반도 안에 가두고 우리역사를 황폐시키고 있다. 위정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들은 역사학자들이 아니다. 이런 자들을 학자라고 기용하고 있는 교육부도 문제이고, 우리역사를 바로세우지 않은 것은 더 큰문제다. 일제가 역사자료 없앴으나 남은 사서에서도 5세기 이전 동이국가가 대륙에 있음이 입증 된다. 허구가 밝혀졌다. 사서(史書)에 의한 동이국가의 위치는 변경될 수없는 것이다. (以上은 吳在成,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48面~55面)을 參照,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九犂系, 新羅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倭-日本史’. 吳在成 編著, ‘지도로 보는 우리나라역사(東夷疆域圖)’.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김동락, ‘천부경과 문디, 거시기’. 황순종,‘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이강민,‘대한국고대사’.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石井進外3人,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李民樹,'朝鮮傳‘.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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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와 일본사는 어디까지 진실인가 80
중국과 일본, 우리의 문물과 제도 전수(傳授)받은 나라
우리는 중국과 일본에 문물을 전수(傳授)한 강대국이다
일본이 우리 역사왜곡에 앞장섰던 동경대학교 교수인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는 식민지의 정당화이론(正當化理論)을 펼친 인간으로 일본의 치욕사(恥辱史)를 만회하려 했던 자이다. 그는 식민사관에 앞장서 우리 민족이 긍지를 갖기 못하게 하기 위해 고대부터 근대까지 독립과 자유가 없는 보잘 것 없는 답보(踏步)의 역사로, 타율성(他律性)·부용성(附庸性)·정체성(停滯性)의 민족으로 서술했다. 또한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인 신라(新羅)의 김춘추는 당(唐)의 힘을 빌려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자로, 왕이 된 후도 사대주의로 우리 민족에게 말할 수없는 오점(汚點)을 남긴 왕이었다. 그는 신라의 과거시험(科擧試驗) 과목(科目)도 자국(自國)의 역사를 부정하고, 중국의 ‘사기(史記)’를 출제하는 국왕(國王)이었다. 이는 오늘의 식민사관자와 진배없는 사대주의자라 할 수 있다. 이들로 인해 우리 역사는 중국과 일본의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의 역사가 만연(漫然)되게 되었다. 우리는 이 무열왕(武烈王)의 행위도 용서(容恕)할 수 없는데도, 아직도 이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못하고 있으며 반성도 하고 있지 않다. 이제는 크게 반성하고 가야 할 때이다.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많은 백제인과 고구려인을 학살하고 고구려인 22만 명과 백제인 또한 이에 못지않은 민족을 끌고 가게 한 일은 용납(容納)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인류사상 최초로 등장한 문화민족으로 모든 문물제도가 한국에서 나왔음을 세계석학은 말한다. 천자(天子)의 문물제도(文物制度), 공자의 유교, 강태공(姜太公)의 군사학과 그 외 주역철학 홍범구주(洪範九疇)도 물질문명도 우리 민족에게서 나왔고 중국은 우리에게 이를 배웠다 고조선은 170개가 넘는 제후국(諸侯國)들에 대해 직접 통치가 아닌 간접 통치를 했다. 그 부족의 장이나 그 수장(首長)에 대해 관료 작위(爵位)를 준 후에, 그 민족의 풍습에 따라서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는 간접 통치 방법을 사용했다. 즉 고조선의 왕조로부터 이반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기미정책(羈縻政策)’을 썼다. 이로 인하여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두었던 것이다. 북사(北史)에 보면 ‘동이(東夷)에게서 수입할 것은 궁시(弓矢)뿐 아니라 기타 문화도 수입한다’고 기록하였다 .(北史, 卷94 末尾). 중국 문화의 중핵(中核)인 황제제도(皇帝制度)도 우리에게서 나왔고, 만 가지 만물제도(萬物制度)가 동이(東夷)에서 창조되었다고 한 것이다. (周易 卷之24 說掛傳). 이에 관하여서는 이미 다 살펴보았음으로 오늘은 중국의 역사가 삼황오제(三皇五帝)부터 모두 우리의 선조(先祖)를 가져다가 모시고 있는데 이런 중국의 역사도 우리가 알아야 역사왜곡에 대처할 수 있기에 오늘은 중국 고대 역사가 어떠하였는지 그 실체를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이 내세우는 중국 문화의 지주(支柱) 삼황(三黃) 중국의 성립을 말하는 데 있어 그들이 가장 내세우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그것은 ‘황제(黃帝)’, ‘황하(黃河)’, ‘황토(黃土)’이다. 여기서 먼저 중국 민족의 조상이라고 숭앙(崇仰)하는 황제제도(黃帝制度)부터 말한다면, ‘황제라는 것은, 여러 가지 도구(道具)와 제도(制度)를 정해서 중국인에 문화생활(文化生活)을 향수(享受)시킨 최초의 제왕(帝王)’이라고 되어 있다. 이 제왕(帝王)들은 모두 우리 선조(先祖)들인데도 중국의 ‘서경(書經)’, ‘시경(詩經)’ 등의 고문헌에서는 그들 이름들을 숨겨서 볼 수 없다. 그 전설(傳說)이 성립한 것은 한(漢)나라의 초(初)기로 본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난 1911년 초에는 황제기원전(黃帝紀元前) 4609년이라고 말했다. 이에 의하면, 황제 즉위는 기원전 2698년이 되나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제멋대로인 계산인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황제의 존재가 있었다고 믿고 역대 왕조의 황제(皇帝)는 새로 등극하면 반드시 황포(黃袍)를 입고 황제묘(皇帝墓)에 참예(參詣)하여 왕조의 발전을 기원해왔다. 이 습관은 제2차 대전 후 모택동(毛澤東)의 시대에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국가 원수가 취임하면 변하지 않고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황제(黃帝) 능(陵)은 서안시(西安市)로부터 동북으로 약 18km 섬서성황능현성(陝西省黃陵縣城)의 한적한 교산(橋山)의 산록(山麓)에 있다. 중국은 역사를 조작, 왜곡하고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자기들의 시조(始祖)라 하며 중국 56민족의 공통의 조선(祖先)이라 한다. 연진족의 금조(金朝), 몽골족의 원조(元朝), 한족(漢族)의 명조(明朝), 만주족의 청조(淸朝)는 다 이를 자랑으로 매년 제전(祭典)을 열며 이를 답습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를 계기로 현재의 56민족은 모두 동일(同一)의 선조(先祖)를 가진 형제와 같다고 하며 결속(結束)을 호소하면서, 동시에 소수민족 압박의 구실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극소수 한민족(漢民族) 이외의 국내 55민족 중, 이를 받아들이는 자는 거의 없다. 중국인이 황제(黃帝)를 가지고 한민족(漢民族)의 조선(祖先)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중국 역사의 골격(骨格)이 빠지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이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 56민족 원래의 조선(祖先)이 아니다. 우리의 선조(先祖)인 것이다. 그러나 환국시대부터 대륙을 지배한 우리 민족과 고대부터 서로 교류하고 혼인함으로 우리 영역의 10%에 불과했던 중국 산악지대의 한족(漢族)도 지금은 조선(祖先)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황하(黃河)는 세계 5대문명의 마지막 문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양자강 다음 제2의 긴 강으로 길이 5464km의 장류(長流)이다. 그 시원(始原)은 청해성(靑海省) 중부의 아납달택산록(雅拉達澤山麓, 5242m)에 있는 약고종열분지(約古宗列盆地)의 샘물이다. 황하(黃河)는 중국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서기전 602년의 주(周)의 정왕(定王) 5년~2600년간에 1590회의 범람(氾濫)을 일으키고 있는데 범람 때, 넓어진 강폭(江幅)에는 대량의 흙인 니토(尼土)가 침전(沈澱)해서 퇴적(堆積)이 거듭하면서 황하(黃河)를 중심으로 하는 중유역(中流域)과 하류역일대(下流域一帶)에는 황토층(黃土層)이 거듭 쌓이며 넓혀졌던 것이다. 또, 중국 문화의 특색이 되는 것은 황토층(黃土層)이다. 이 황토층은 서(西)는 청해성(靑海省), 감숙성, 남(南)은 섬서성(陝西省), 북(北)은 산서성(山西省), 내몽골, 산동성(山東省), 하북성(河北省)까지 넓혀져 있다. 이 황토는 화학적으로 알카리성인데 철분이 대량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이 토양은 건조(乾燥)시에는 단지 황색의 땅이나 물이 포함되면 비옥한 토양이 되기 때문에 농경에 최적의 환경이 된다. 이 비옥한 땅은 황하가 범람해서 이뤄진 땅이다. 원래 산동반도(山東半島)도 섬이었으나 이 퇴적된 흙이 쌓여 지금은 대륙의 반도가 형성된 것이다. 동이(東夷)가 황하 유역에 국가를 탄생시켰다 역사시대인 단군시대가 되니 갑골문자에 의해서 수많은 대륙의 국가는 수백의 부족국가들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우리 동이국가들이 번성한 곳으로 상고시대부터 고대까지 지배한 곳이다. 중국사는 동이가 세운 주(周)와 은(殷)나라도 자기들의 나라라고 하나 동이의 나라이다. 이 나라들도 세력(勢力) 확대(擴大) 방향에서 서주(西周)의 예를 보면, 낙읍(洛邑,낙양(洛陽)이나 호경(鎬京) 후에 장안(長安-현재의 서안(西安)으로부터 동방(東方)으로 확대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살기 좋은 평야지대로 교통이 편리하고 교역이 편리한 이곳은 우리 동이족이 사는 터전인데 이곳을 탐해 한족(漢族) 집단이 서쪽의 척박한 사막을 넘어서 황하(黃河)나 위수(渭水;감숙성위헌원(渭源縣)에서 황하로 흐르는 강)에 와서 정착하려고 배달국 시대부터 화하족(華夏族)의 우두머리가 된 헌원(軒轅)과 치우천황(蚩尤天黃)과의 영역을 차지하려는 73번 싸움은 유명하다. 이는 황하 중유역(中流域)인 낙읍(洛邑)이나 위수(渭水)부근에 있는 호경(鎬京)이 어찌해서 이곳에 고대국가가 성립하였는가를 보면, 이곳은 농경지(農耕地)로서의 매력(魅力)보다도 교역(交易)을 위한 거점(據點)으로서 국가경영에 가장적합한 곳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족(漢族)도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고 탐(貪)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황하(黃河)는 한족(漢族)에 있어서도 오랜 숙원이었고 이곳은 황하문명(黃河文明)의 모체(母體)가 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족(漢族)이 어떻게 이곳에 출현했는가? 에 관해서 고고학서(考古學書)를 보고 풀이해서도 한민족(漢民族)의 정의(定義), 그 자체가 애매모호(曖昧模糊)하기 때문에 명해(明解)한 정답을 얻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외국 사학자(史學者)들도 말할 정도다. 그러나 중국은 역사를 왜곡하며 한자(漢字)는 자기들이 화북지방(華北地方)에 있는 동안 만든 양 중일(中日)의 사학자라는 자가 말하는 자도 있으나 한자(漢字)도 우리가 만든 것이다. 모든 문물제도(文物制度)며 문화(文化)가 우리 동이(東夷)에 의해서 전해진 것을 숨길 수 없다. 황하문명도 그 이전에 요하문명을 비롯해서 세계 5대문명이 동이족에 의해 주도(主導) 되었다. 고대 중국의 한족(漢族)은 그들의 문물제도와 영역(領域)도 우리 동이(東夷)를 따를 수 없었다. 중국 한족(漢族)이 중국영역(中國領域)내에서 영역을 변경(邊境)으로 진출하였다 하나, 변경은 아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1949년 건국한 이후의 일이다. 일반적으로 한민족(漢民族)이란, 현재 중국 정주{(正州);(본토)}에 거주하는 황색인종(黃色人種)으로 중국어(中國語)를 말하고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민족을 말하나, 한민족(漢民族)은 원래 중국 정주(正州)에서 발생하여 그 후 점차 발전 확대(擴大)해갔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미 밝힌바 대로 고인류학적(古人類學的), 고고학적(考古學的)으로 조사해가면, 중국 한족(漢族)의 시조(始祖)는 단일(單一)이 아니라 거의 모두가 중국을 정벌(征伐)하고, 정복(征服)하여 지배(支配)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주종(主從)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중국이 조상(祖上)으로 모시고 있는 삼황오제(三皇五帝)에 대해서도 일치하는 학설이 중국에 없다. 그들이 말하는 수인씨(燧人氏-여기서 씨(氏)는 신(神)을 말한다.)는 우리 선조(先祖)임은 역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태호복희(太皥伏犧),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 소호(少昊),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 모두는 다 우리 동이족(東夷族)이다.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상고시대부터 수렵(狩獵)을 하다가 고대에 와서 농업을 하며 대륙에 정착하고 시대가 흐름에 따라 비옥한 토양(土壤)인 황하유역(流域)에 이미 정주(定住)해 있었다. 이후 이 동이족은 타민족과도 융합(融合)되면서 오늘의 중국이 이뤄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고대 은(殷)국가 성립과 국호(國號)의 의미(意味) 고대 중국 은(殷)의 건립과 당시 상황을 보면 우리와 판이함을 알 수 있다. 사서에 의하면 은(殷)의 시조인 계(契)는 전설의 왕조, 하(夏)의 우왕(禹王)에 의한 황하의 치수사업을 도운 공적에 의해 제순(帝舜)의 시대에 하남(河南)의 상(商)의 지(地)에 봉(封)해졌다고 말해고 있다. 은(殷)의 명칭은 상(商) 왕조의 유렵지(遊獵地)로부터 취했다고 하는데 국호(國號)인 상(商)이라는 글자는 실은 여성이 애를 낳는 다리사이 혈(穴) 즉 여음(女陰)을 나타내는 문자(文字)이다. 더욱이 은(殷)이라는 문자도 상형문자(象形文字)인 신(身)과 어느 행위를 행하는 의미의 수(殳)를 합친 회의문자(會意文字)로서 여성의 태아를 숨기는 의미의 문자인 것이다. 즉, 은(殷), 상(商)의 문자는 원시시대 회임의 기쁨과 부족발전이 오래되기를 바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은(殷) 역시 동이족으로 서기전 1600년경, 부족국가의 연합체(聯合體)로서 화북일대(華北一帶)를 지배했으나 이 민족이 출현이 다름 아닌 우리 동이(東夷)의 유목민(遊牧民)이었다. 이를 유추(類推)시키는 중요한 증거(證據) 자료(資料)가 있어 입증이 된다. 하나는, 은(殷)나라의 수도가 시조(始祖)부터 11대탕왕(湯王)에 이르기까지 8회나 천도(遷都)를 하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더욱이 탕왕(湯王)으로부터 19대에 해당하는 반경(盤庚)의 대까지 5회나 천도(遷都)했다고도 되어 있다 . 이는 그 시대 외침(外侵)이 심한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은(殷)나라에서는 각종이 축제(祝祭)때 반드시 동물을 제단 앞에 희생의 공물(供物)로서 올린다는 것이다. 그것도 당초에는 양(羊), 소, 돼지였다가 시대가 내려오면서 은(殷)과 적(敵)이 된 강족(羌族)의 사람을 붙들어 와서 희생의 제물(祭物)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소(牛)나 돼지(豚)는 식용으로서 이용되나 양(羊)은 털을 생산하기 위해서 유목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동물이다. 신(神)에게 제사를 드릴 때에 양(羊)을 희생의 제물(祭物)로 쓰고 있었다는 것으로부터 은(殷)의 탄생은 원래는 유목민(遊牧民)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은(殷)은 서기전 1300년 경에는 이미 정교한 청동기를 제작하고 한자의 조형(祖型)인 갑골문자(甲骨文字)를 발명하고 있었다. 갑골문자(甲骨文字)는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소돈촌(小旽村) 은허(殷墟)로 전해지고 있는 곳으로 1899년에 발견되었다. 이 문자는 신석기시대의 범주(範疇)에 들어가는 순수한 회화문자(繪畵文字)로부터는 상당히 진보한 것으로서 이 문자가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요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출토한 문자 3000자 중, 800자 정도는 해독(解讀)되었다고 한다. (이상 眞實の中國四千年史’.24面~39面,參照 引用.) 그런데 문자는 은시대(殷時代)보다 먼저 이미 “신시배달국시대(神市倍達國時代)부터 녹서(鹿書), 녹도문(鹿圖文)이 있었으며, 복희의 용서(龍書), 치우(蚩尤)의 화서(花書), 자부선생(紫府先生)의 우서(雨書)라는 문자가 있었고 고조선 시대에는 전서(篆書), 또는 진서(眞書)라는 문자가 서기전 2181년의 을보륵(乙普勒)이 지은 38자(字)가 있었는데 이를 ‘가림토’라고 하였다 . 이 외에도 왕문의 부예(符隸), 왕차중의 해서(楷書)등이 있었다. 이와 같은 문자는 은(殷)시대의 제사(祭祀), 사회(社會), 정치(政治), 경제(經濟) 등이 해명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는 전설(傳說)의 범위를 못 벗어났던 은(殷)의 존재가 역사시대(歷史時代)로서 인식(認識)하게 되었다.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41面, 參照 引用.) 또 우리가 만든 한자(漢字) 수는 이후 계속 증가(增加)하여 송(宋)나라 시대인 990~1053년에 사마광(司馬光) (1019~1088년)이 편집한 자서(字書)는 53,525자(字)에 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고대 특히 당(唐) 때부터 송(宋), 명(明), 청(淸)나라에 와서 역사왜곡이 더 심했음을 우리가 주시(注視)하고 그 왜곡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 고대 강역도 대륙으로 우리는 대륙사관(大陸史觀)이어야지, 반도사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사대사관(事大史觀)이고, 식민사관(植民史觀)이다. 이 조작, 왜곡된 사관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고대부터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모든 영역에 있어서 우리의 제도와 문물, 기술을 전수(傳授)받은 나라임을 제대로 알고 말을 해야 한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윤진영 編集 ‘三國史’.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문화열차’. 황순종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이강민 ‘대학국고대사’,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外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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