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치

언론에게 당해봤어?…칼에 찔리고 펜에 찔리고

[CBS 변상욱 대기자]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 김현정의 뉴스쇼 >

'기자수첩 시즌2'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한명숙국무총리뇌물수수 혐의가 무죄로 확정되었다. 1심 무죄, 2심 무죄, 대법원까지 무죄이다.

그렇다면 한명숙 전 총리가 업자로부터 5만 달러 뇌물을 받았다고 맨 처음 소리친 주인공은 누굴까?


 

사건일지를 보면 2009년 12월 4일 < 조선일보 > 가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5만 달러 뇌물수수 의혹'을 제기했다.

 

뇌물을 주었다고 거짓진술을 한 사람은 조선일보 보도 한 달 전에 이미 감옥에 들어가 있었다.

조선일보는 누구를 취재했을까? 검찰이 흘리고 언론이 받아썼다는 의혹의 여론이 짙었던 사건이다.



당시 한명숙 전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일보 기사를 읽고 국민 여러분께서 걱정 많이 하셨지요?

안심하십시오. 언론에 보도된 내용, 진실이 아니다. 저는 결백한다. 제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조선일보 기사로 시작된 '곽영욱 사건'은 재판에서의 진술이나 증거불충분을 볼 때 무죄가 확실해 보였다.

2010년 4월 9일 법원의 무죄 판결이 내려지기 하루 전 이번에는 동아일보가 '한만호 사건'이라는

새로운 뇌물혐의를 보도했다.



사건은 다시 불이 붙었고 8달 뒤인 2010년 12월 20일 검찰 측 핵심증인인 한만호씨가 법정에서

"나는 한명숙 전 총리님께 돈을 준 적이 없다. 한 총리님은 지금 누명을 쓰고 계신 겁니다"라고 증언했다.

 

 

 이 증언이 나오자 재판정에 와 있던 한명숙 전 총리가 울었고,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이기명 전 노무현 후원회장... 다들 울었다.


한명숙 전 총리의 무죄 확정에 이르는 기록은 대한민국 언론들의 추악함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기록이다.

기자들은 새겨두어야 한다.



"피의자 혐의를 공표하는 것은 위법행위이다. 그리고 공표되는 피의내용은 '사실'이 아니라 '주장'이다."

국민에게 알릴 공적책임이 그만큼 크고, 혐의 사실에 다툼이 거의 없을 때에 한해 받아쓸 일이다.

특히 검찰이 정치적으로 흘려주는 걸 줄줄이 받아쓴다는 것은 범죄공모나 다름없는 것이다.



네티즌들은 이명박 정부 시절의 정치검찰과 매일 1면에 한명숙 전 총리의 '뇌물수수가 유죄확정인 것처럼

기사를 뿌려댄 언론들은 양심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사과문을 내라',

'유죄인 것처럼 썼던 기사 건수만큼 사과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언론인권센터가 창립 10주년을 맞아 펴낸 언론 피해자 구제 사례집 <

 언론에게 당해봤어? > 를 최근에 발간했다.

 

"정권을 감시하고 독재를 견제하던 언론은 오랫동안 핍박을 받았다. 그때 언론은 정권에 당했다.

요즘은 시민이 언론에 당하는 일이 심심찮다. 속보 경쟁 때문에, 선정성 선점 때문에 언론은 맘이 급하다.

부실한 뉴스가 인터넷을 도배하고 찍힌 개인은 하루아침에 괴물이 된다.

 

 

사실이 확인되어도 피해는 여전하다. 사람들은 모두 처음 이야기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지키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


 

언론으로부터 인간을 지키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대목은 죄스럽고 아프다.

책에는 거리를 헤매는 지능이 낮은 장애인을 거둬 가족처럼 돌 본 사람이 장애인을 노예로 부리다 내버린

악덕 농장주로 둔갑했던 2006년 5월의 모 방송 오보사건, '현대판 노예 사건'이 실려 있다.


재판 과정에서 면사무소 직원과 파출소 경찰관이 "가족처럼 잘 대해준다. 고발과정에서 마을 사람들끼리의

갈등문제가 있고 사정이 복잡하니 자세히 취재를 하라"고 조언했지만 방송이 이를 무시하고

화끈한(?)쪽으로 몰고 가 명예를 크게 훼손한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언론에 의해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당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말이다.

담당자들과 전화 통화를 하려고 해도 만나주기는 커녕 대화를 회피하고, 간신히 통화가 되어도

"나는 시키는 대로만 했다", "외주제작사가 잘못한 거다", "앗 실수, 조사가 불충분하다보니...".



그 약간의 실수와 착각과 미흡에 의한 피해는 너무도 크다. 책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당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소송은 수년이 걸린다. 비용도 부담스럽다. 원상회복은 불가능하다.

회복되어봤자 미미한 수준에 그친다. 개인이 상대하기에 언론은 너무 큰 조직이다.' 그리고 이렇게 질타한다.

"그 이면에는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표준상품을 제작해야 하는 언론의 상업화, 언론자본의 경제화가 숨어 있다."


◇ 펜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

기자·피디(PD)라고 안온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은 아니다. 방송사의 제작 PD가 거꾸로

언론의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KBS 남 아무개 PD가 < 한국논단 > 에 의해 '주사파', '친북주의자'로 묘사돼 소송을 제기했고

6년간의 소송 끝에 2003년 대법원으로부터 승소 판결을 받았다.


지난 18대 대선 당시 정수장학회 이사장 최 아무개 씨와 MBC 기획홍보본부장 이 아무개 씨가 만나

몰래 MBC 지분 매각을 논의한 사실을 보도한 한겨레신문 최 아무개 기자는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도청도 아니고 최 기자가 최 이사장과 통화한 뒤 최 이사장이 종료 버튼을 제대로 누르지 않아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니, 들리는 대로 적어냈을 뿐이었다.


어떨 때는 기자는 얍삽하게 빠져 나가고 국회의원이 피해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죄로 국회의원 직을 내려놓은 '삼성 X파일 사건'의 노회찬 전 의원이 그렇다. '도둑 들었다고 소리치니까 남들 듣게 소리쳤다'고 감옥에 보냈다는 본인의 말 그대로다.



기자가 인터넷에 올리면 무죄일 수 있지만 기자들이 다들 올리지 않아, 보다 못한 국회의원이 올리면 유죄다.

말이 되는지 모르지만 법의 취지가 그렇다. 기자가 올렸다가 핍박을 당한 사례도 물론 있다.

MBC의 이상호 기자 역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래도 이런 사건은 언론에 보도라도 된다. 최근 < 춘몽 > 이라는 아이디의 한 시민이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70일 넘긴 1인 시위에 이어 10 여일 넘게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다.

 

18대 대선 개표에 의혹이 있으니 수개표다시 하자고 촉구하는 농성이다. 우리 언론에선 한 줄도 보도되지

않는다. 유죄판결 경험자인 이상호 기자의 'go발뉴스' 한 곳만 보도하고 있다.



그 시민이라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저러겠는가. 사회의 정의와 공정함이 훼손됐다는 생각에 나선 것이다.

부정개표 의혹의 사실 여부에 대한 판단을 떠나 국민들이 의혹을 해소 못해 목숨을 건 진상 규명 호소가

진행되고 있다면 소식은 전해야 하지 않나.



크게 보면 이 사건들은 공통점이 있다. 언론이 잘못 보도해서 망가지고, 언론이 외면한 걸 이야기하다 망가지고, 다른 언론이 입을 닫고 있는 문제를 거론하다 망가진 거다. 그리고 누구도 이야기를 안 하니 시민이 목숨을 건다. 우리 사회의 공공성과 공정함이 힘을 잃고 무너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좋은 저널리즘은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품격과 권위, 존재의 목적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 확신이 좋은 기사를 만든다.

이제 저널리스트는 조직의 구성품으로 머물기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시각과 자부심, 가져야 할 만큼의 깊이를 갖고 자신을 드러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려면 '기자란 누구인가?', '나는 왜 기자가 되려고 했는가?'... 때때로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고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눈빛으로 답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져 나가야 한다.

sniper@cbs.co.kr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 저작권자 ⓒ CBS 노컷뉴스(www.nocutnews.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