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과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밀월’이 주목된다.
코드가 전혀 다를 것 같은 두 사람이 최근 여러 부문에서 착착 호흡을 맞추고 있다. 삼성이 노대통령의 방미를 앞두고 텍사스 공장에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고 발표해 분위기를 띄운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회장이 대통령을 수행해 미국을 방문하는 것은 1988년 이후 15년 만이다.
이례적인 일일 뿐더러, 이회장이 실질적으로 재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어서 상징성도 크다.
노대통령이 미국에 머무르는 6박7일 동안 두 사람은 노대통령과 재계 인사들의 만찬,
코리아 소사이어티 만찬, 미국 상공회의소와 한·미 재계회의가 주최하는 만찬 등에서
최소 세 차례 얼굴을 맞댄다.
미국을 방문하는 노대통령의 화두는 경제이다.
문희상 대통령 비서실장이 공식 방문단에서 제외되고 손길승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을 비롯한
경제 4단체장 등 경제인 28명이 동행하는 것이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북한 핵이나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처럼 안보와 관련한 의제들도 따지고 보면 결국 경제 문제다.
이런 측면에서 이건희 회장의 역할은 더 두드러진다.
삼성그룹은 씨티그룹과 함께 5월12일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코리아 소사이어티 만찬을 후원한다.
노대통령이 연설을 하는 이 행사에는 씨티그룹 로버트 루빈 회장, GE 제프리 이멜트 회장,
휴렛패커드 칼리 피오리나 회장 등 미국의 유력한 재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다.
이회장은 또 크레이그 배럿 인텔 사 회장을 만나 인텔이 아시아에 지으려고 하는 반도체 공장을
한국에 유치하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정부는 4월22일 일정액 이상을 투자하는 외국인 업체에 현금을 보조하는 방안까지 논의했을 정도로 인텔 공장을 끌어들이려고 애쓰는 중이다.
인텔이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 중 하나인 만큼 경제적·전략적 가치가 크고,
노정권이 지향하는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하는 데 공장 유치야말로 더없는
디딤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5월2일 삼성전자가 부시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인 텍사스 주에 있는 오스틴 공장에서
반도체 생산 설비를 교체하기 위한 설비 반입식을 가진 것도 노대통령의 방미를 앞두고
미국 내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삼성의 노력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앞으로 최대 5억 달러에 달하는 설비를 반입하겠다고 발표한 이 행사에는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지 H.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참석했다.
삼성그룹 홍보팀 정원조 상무는, 우호적인 한·미 관계가 기업에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노대통령이 미국 방문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도록 발벗고 나서는 것이라고
이회장이 적극적으로 행보하는 배경을 설명했다.
재계에는 이회장이 노대통령의 방미를 ‘돕는다’는 소극적인 차원을 넘어 ‘성과를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재계의 실질적인 ‘힘’을 대통령에게 보여주려는 것 같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노대통령과 이회장의 관계는 이학수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이 노대통령의 부산상고 선배여서
진작부터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주목되기 시작한 것은 올 초부터였다.
노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이던 1월 초 삼성경제연구소는 ‘국정 과제와 국가 운영에 관한 아젠다’를
작성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연구원 70여명 거의 전부가 투입되어 한달 반 가량 작업한 끝에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12대 국정 과제’를 확정할 즈음인 2월 중순,
4백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보고서를 노대통령 쪽에 전달했다.
노대통령의 강력한 유치 의지에 발맞추어 정부는 국무조정실 안에 ‘정부지원 종합상황실’을 설치하는 등 범정부 차원에서 평창 겨울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삼성이 가장 앞장서고 있다.
현재 겨울 올림픽 유치 활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회사는 농협·두산·동부·강원랜드 등
10여 개에 이른다. 하지만 5대 기업 가운데는 삼성이 유일하다.
유치위 관계자는 삼성이 재정에 어느 정도 기여하느냐고 묻자 ‘엄청나다’면서도 내역은 밝히기를
꺼렸다. 이회장이 IOC위원이어서 혹 윤리 규정에 위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지원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있다.
삼성은 올 2월 IOC평가단이 방한했을 때 영동고속도로 옆에 있는 크고 작은 그룹 소유 광고판을
모두 평창 겨울 올림픽을 홍보하는 내용으로 바꾸었다.
평가단이 묵었던 롯데호텔 앞 삼성화재 건물 옥상에 있던 광고판도 마찬가지였다.
이 광고판은 최근 평창 겨울 올림픽 내용을 지우고 다시 삼성 제품을 광고하는 쪽으로 바뀌는 중이다. 이회장은 자크 로게 IOC 위원장과 친분이 두텁고,
삼성은 미국 솔트레이크 겨울 올림픽의 공식 스폰서로 활동한 적이 있어 삼성과 겨울 올림픽은
인연이 깊다.
재계 인사들은 노무현 정권의 경제팀 가운데 삼성을 견제할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김진표 부총리 겸 재경부장관에 대해서는 ‘삼성 사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삼성 처지에서는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과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이 ‘껄끄러운 사람’으로
통하지만, 이들은 학자 출신이어서 실물 경제에 약하고 추진력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다.
노대통령과 이회장의 ‘밀월’을 과거와 같은 권력과 재벌의 유착으로 보는 것은 과도한 추론이다.
오히려 현상황이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안보와 경제로 재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한·미 관계의 균열을 막아야 한다는 점,
정치적으로 삼성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원했다’는 부담을 안고 있고
노대통령은 소수파라는 힘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후계 구도를 원만하게 완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삼성 처지에서는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아 적극 대응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 고위 관계자는 정권과 가까운 관계라느니 하는 식으로 보는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이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양쪽 다 상대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상황에 따라 언제든 양자의 관계는 변화할 수 있다. 삼성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는 내년 총선에서
여권이 압승한다면 다시 재벌 개혁 문제가 전면에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밀월’ 물밑에서 여전히 긴장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한창 이 보고서를 만들고 있을 무렵 전국경제인연합회도 ‘삼성 체제’로
재편되었다. 이회장이 손길승 SK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삼성은 이회장의 비서실장을 지냈고 삼성저팬 회장으로 있던 현명관씨를 전경련 부회장으로
‘파견’했다.
전경련 실무를 총괄하며 전략사업단 단장을 맡고 있는 이규황 전무도 삼성경제연구소 부사장을
지낸 삼성맨이어서 전경련은 그 어느 때보다 삼성 색깔이 강해졌다.
삼성은 전경련 4백여 회원사 가운데 가장 회비를 많이 내고 있다. 전경련 조성하 상무는
“삼성이 재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에 걸맞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라고 진단했다.
조상무의 말처럼 ‘삼성’이 지배하는 전경련은 과거와 확실히 달라졌다.
전경련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주5일제 도입에 반대하는 신문 광고를 내고 심지어 만화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4월22일 삼성이 5월부터 토요 휴무제를 실시하겠다고 전격 선언하자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다. 삼성은 ‘주5일 근무제 입법에 앞서 정부의 시책에 부응하기 위해 토요 휴무제를 실시한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