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어색한 웃음 뒤에는 독기가 서려 있다
대사헌 (ijl1****)
태생과 성장기의 문제
육군 대령의 딸로 1952년 출생한 박근혜는 이듬해 준장 진급을 한 박정희의 실제적인 둘째 딸이며
친일매국노 육종관의 딸 육영수와의 사이에서는 장녀로 태어났다.
박근혜가 9살이 되던 1961년 그녀의 아버지는 군사 반란을 일으켜서 대한민국의 정권을 한 손에 잡았다.
11살이 되던 이년 후 1963년 10월,
이제 막 자아가 눈뜰 무렵부터 청와대라는 차단된 공간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박정희가 잡은 정권의 무려 18년동안 사춘기와 성년이 되는 기간을 모두 폐쇄된 공간에서 지내 온 것이다.
중세 시절의 공주도 심각한 장애가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긴 세월을 아버지의 왕궁에서 보내기 어려웠다.
학교를 다니느라 외부로 나가기는 했지만 경호원들이 따라붙어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둘째 딸인 근영은 경호원을 따돌리는 등 자유분방하게 행동했으나
박근혜는 비교적 순종적이어서 학교와 청와대 외에는 다니지 않았다.
이런 폐쇄된 공간에서 성장한 경우는 보통사람과 자신은
다른 세계에 있다는 차별의식이 뿌리 깊게 심어질 수 있다.
그래서 청와대를 나와서 사회 적응이 어려웠던 것이다.
정치 활동도 꼭 필요한 만남 외에는 혼자 지내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일전에 ‘동아일보 여기자 회식 성추행 사건’ 이후에는 이를 핑계로 더욱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박근혜의 정신 문제
박근혜의 정신문제는 위에서 쭉 살폈듯이 단연 폐쇄성이다.
이런 사람들은 혼자 상상하고 즐거워하고, 때론 분노도 한다.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경향도 농후하다.
한편으론 일정한 틀을 정해 주면 그 안에서 요지부동 고집을 피우는 면도 있다.
그래서 이성에 입각한 판단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도 거절하고, 여성 총리 시대의 여성 헌법재판소장 임명은
자신이 여성으로서 처음 대통령이 되는 토대를 쌓아 줌에도 남의 말을 듣고 걷어차 버렸다.
불행한 집안과 의문점
한국 전쟁이 휴전한 1953년 이후에 부모가 모두 머리에 총을 맞고 죽은 경우는 없다.
그런 면에서 비극의 주인공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면이 감성적인 국민으로 하여금 많은 동정심을 불러오고 있다.
하지만, 두 사건 모두 박정희의 책임이 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한 북한이 1974년 8월15일 암살자를 보내서 박정희를 저격하다가
육영수 여사가 대신 저격당했다는 것은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다.
1973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일본에서 납치한 사건을 무마하기 위한 조작극이었다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자신의 죽음은 심복에게 당한 것이라 누구를 탓할 수 없다
국가관과 군대에 대한 인식
신화적으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박근혜의 첫 말이다.
“전방은요?”
부모의 죽음에 슬픔보다 나라를 걱정하는 이 말을 자랑삼아 박근혜는 투철한 국가 안보관이 있다고 한다.
이를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당시에
아버지 박정희가 국사를 돌보지 않는 황폐함을 평상시 염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군대는 나라를 위해서 한목숨 바치러 가는 곳이니까 무조건 참으라고 만하지
노무현 대통령처럼 썩고 온다는 말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는 본인이 군대에 갔다 오거나, 자식을 군대에 보내 봤어야 할 수 있는 말이다.
현실인식이 바로 서야 개선도 나오고, 전투력도 기를 수 있다.
남들 보고는 참고, 견디라고 하며, 이회창이 같은 자는 자식들을 모두 빼돌렸다
박근혜나 이회창은 군대에 대한 논리는 아주 단순하다.
목숨 바치러 간 넘들이 뭘 못 참느냐는 식이다.
폐쇄성이 부른 피해
지금은 많은 사람과 접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서 그렇지,
만일 정치를 하지 않았다면 정황으로 보아 자폐증이나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을 것이다.
남동생 박지만이 마약을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행히 박근혜는 복잡한 머리구조를 갖지 않고 단순해서 심한 정신병에 시달릴 것 같지 않다.
정수장학회(박정희의 ‘정’, 육영수의 ‘수’)의 실권을 잡기 위해서
일전에 엄청 연하의 남자와 결혼한 여동생과 육박전을 벌이기도 했다.
정수 장학회는 ‘육박장학회’로(육영수의 ‘육’ 박정희의 ‘박’) 바꾸어야 한다.
여기다 남동생은 상습 마약 중독자가 전과가 있으니
이쯤 되면 대한민국에서 보기 드문 콩가루 집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이 돈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폐쇄성은 결국 결혼마저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그녀로서는 치명적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문제 삼지 않는 사회 현상은
대한민국에서 여성 정치인은 진정한 여성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전 대변인 전여옥을 여자로 보지 않듯이 말이다.
대게의 여성 정치인은 같은 여성을 믿지 않거나 속으로 환멸까지 한다.
그래서 보통 여성들은 남자로 인한 것도 있지만,
여성 같지 않은 잘난 척하는 여성을 보며 더 좌절감을 느낀다.
결혼생활이 인격 형성과 완성에 얼마나 중요한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자녀를 길러보지 않은 사람은 온전한 정책을 펼 수 없다.
박근혜의 경제관
박근혜는 청와대를 나온 1980년 이후 정수장학회 이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매월 1천만 원이나 되는
당시에는 거액인 월급을 꼬박꼬박 타 먹었다.
아버지가 남긴 ‘궁물’을 빨아 먹고살아 왔다.
이는 자기가 장학생인 줄 아는가 보다.
말이 장학회지 설립은 박정희가 모 기업의 재산을 강탈해서 만든 것이었다.
박근혜는 도무지 사회생활과 온전한 경제 활동을 해본 적이 없다.
독재의 ‘궁물’을 빨아먹고 산 이런 박근혜가 서민을 걱정하고, 경제를 말하는 것은 가증스러움의 극치다.
그 안에 경제의 현실감이 존재할 수 없다.
국정 운영 경험
박근혜는 몇 년간 어머니 대신 퍼스트레이디를 한 경험을 내세운다.
지금에 비한다면 박정희 시대는 석기시대에 가깝다.
혹여 그때의 경험으로 국정을 운영한다면 대한민국 나라꼴은 엉망이 될 것이 뻔하다.
그 경험이 소중하다면 전두환 부인인 이순자가 더 낫다.
한나라당 대표로 있을 때, 공개 석상이나 언론 취재에 나설 때는
누군가 써준 수첩을 들고 옆에는 항상 이재오가 있었다.
어딘가 부족함을 메우기 위함이다.
말이 당 대표지 얼굴마담 역할만 한 것이다.
도무지 창의성이란 찾아 볼 수 없는 박근혜는 역사를 자기 아버지 시대로 돌릴 수 있다.
용도폐기 절차만 남은 박근혜
천막 당사 이전부터 한나라당은 돈이 없었다.
원래 있는 놈들이 더 짜다고, 정해진 당비도 잘 내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고
당 운영비를 대표인 박근혜가 많이 부담했다.
이제 그 돈도 다 빨아 먹고, 지자체 선거 전에 난장에서 얼굴을 그여서 몰표를 받은 후 용도 폐기당한 것이다.
공정한 경선을 위해서 당 대표직을 내려놓으라고 했다.
다 이용해 먹었다는 뜻이다.
이때부터 박근혜는 언론으로부터 멀어져서 서서히 지지도가 떨어지고
반대로 조, 중, 동이 열심히 띄워 준 이명박은 엄청 오르기 시작했다.
박근혜는 당했다고 생각했으나 때는 늦었다.
그래서 배신감 때문에 이를 갈고 있다. 그래서 박근혜의 어색한 웃음 뒤에는 독기가 서려 있다.
일전에 이명박 검증론이 한창 불거질 무렵에 미국 법원에 기소를 당해서 가지 못하는 이명박을 약 올리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는 힐러리에게 모욕을 당하고 왔다. 힐러리가 만나주지 않은 것이다.
대한민국 야당의 유력한 대권 후보를 만나주지 않은 이유는
독재자의 딸을 만나서 자신의 이미지를 버릴 힐러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박근혜에 대한 염려와 역사의 요구
독재자의 딸로 태어나서 독재의 ‘궁물’을 빨아 먹고산 박근혜는
오늘날 역사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건 바로 자숙(自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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