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준비되지 않는 싸움은 진다 - 몽양 서거 75주기에 -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2022/07/19
오늘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흉탄에 쓰러진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5주기다.
그런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추도식 외엔 행사가 없다.
과거는 5년마다 그리고 몽양이 중심이 되어 활동한 단체와
좌우합작운동 관련 인사들에 관한 행사가 제법 있었다.
의미 있는 것으로는 몽양 70주기를 맞아
2017년 7월 18일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의 강연회
「통일시대의 몽양 여운형 선생을 다시 생각한다」가 있었고,
7월 19일에는 백범기념관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 70주기 추모식」도 있었다.
그리고 「70주기 추모 학술 심포지엄」은
서거일을 한참 지난 11월 29일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주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국내외 좌우합작운동과 오늘의 남북관계’였다.
발표자들은 해방정국에서 정치협력과 남북협력으로 대변되는
몽양의 좌우합작운동은 서거 70년이 지났어도
오늘날에도 유의미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몽양 선생이 중심이 된 「신한청년단 결성 100주년 기념식」이
2018년 11월 28일 광화문 교보빌딩 컨벤션홀에서 개최되었다
. 신한청년당은 1918년 11월 28일 결성되었고
1919년 4월 19일 결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모체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2016년 4월 8일에는
「반독재 평화통일의 기수 여운형,
김규식, 조봉암 선생 학술회의」가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대부분 남북관계 발전과 남쪽 민족대단결에 역점을 둔 정치 토론회가 많았다.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건국동맹’을 만들어 해방과 민족의 독립을 가장 먼저 대비한다.
함석헌 선생은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해방이 뜻밖에 온 것이 아니고
국외 중국과 소련 접경지역에는
항일 무장 독립운동 세력이 창설되거나 싸우고 있었고,
국내에도 해방을 위해 준비해 온 세력이 있었다.
국외 항일 무장세력으로는 대표적으로
김구 선생의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광복군),
김두봉 선생의 화북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
김일성 주석의 만주 동북항일연군 등이다.
또한 국내에는 몽양의 건국동맹과
이재유, 이관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과 노동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이재유는
형 만기 이후에도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석방되지 않아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옥사하였고,
이관술은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박헌영은 은신 중이었다.
스탈린은 레닌, 트로츠키, 부하린이 해외에서 활동할 때,
차르의 엄혹한 탄압 속에 체포와 유배
그리고 탈출을 반복하면서도 러시아를 떠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국내에서 혁명운동을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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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고등경찰의 감시와 친일파
그리고 일제의 첩자들이 암약하고 있는 조건에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다
. 물론 스탈린과 달리 국내에서의 혁명운동과
국외 중국 무장세력과의 연대를 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다.
그런데도 몽양은
이미 누구보다도 다양한 정보수집을 통해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였다.
그는 일본을 직접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현황을 파악하였고
중국의 이영선과 최근우 동지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면서 정세를 분석하였다.
그리고 1942년 4월
동경을 방문했을 때 미군 비행기의 최초 동경공습을 직접 목격하고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면서 ‘건국동맹’을 만들어 해방에 대비했다.
건국동맹은 1944년 8월에 결성되었지만,
활동은 이미 194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건국동맹’은 1) 각인 각파와 대동단결하는 것
2) 반추축 제국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전선의 형성하는 것
3)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농대중의 해방에 치중하는 것 등 세 가지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추축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연합국에 대항해 형성한 동맹)
‘건국동맹’의 대동단결과 연합전선은 이후 몽양의 중심노선으로 민족대단결 노선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남북을 넘나들며 좌우합작·남북연합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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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은 남북의 정치 지도자 가운데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다섯 차례 방북하여
김일성 북조선 임시인민위원장과 회동하였다.
통일뉴스는 북한 매체 우리민족끼리가
‘영생하는 몽양 려운형 선생’이라는 제목으로
서거 70주기인 2017년 19일, 전날에 이어 추모 기사를 연재했다고 소개하였다.
매체는 1946년 2월 11일
남쪽에서 좌우합작 운동을 벌이던 몽양 선생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처음으로 만나
건국 사업에 대한 의견을 나눈 일화와
몽양 선생의 서거 소식이 알려진 후 김 주석은
자신을 대신해 민전 대표를 보내 조사를 하도록 했고
이듬해인 1948년 7월 19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결성 1돌 기념대회에서도
몽양 선생을 추모하도록 했다고 한다.
또한 몽양 선생의 부탁에 따라 그의 자녀인 여연구,
여원구를 자기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했으며
김일성 주석은 1991년 11월 25일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2차 토론회에
북측 대표단 단장으로 참가한 차녀 여연구가
44년 만에 서울 우의동에 안치된 아버지의 묘소에 성묘하러 갈 때
‘고 몽양 려운형 선생을 추모하여
김일성’이라는 글귀와 함께 화환을 보내기도 했다고 소개하였다.
몽양 선생은 북쪽에서는 반일애국지사, 통일애국지사로 불린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백범 김구나 안중근 의사와는 달리
몽양은 좌익의 대명사로 이름조차 금기시되고,
울타리가 쳐진 우의동 묘소에서 겨우 추모식만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던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서훈 2급)이 추서되었으나,
그것도 눈치를 보다가 2008년 노무현 정부 마지막 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급)으로 서훈이 승급될 정도였다.
몽양은 비상한 시기에 비상한 방법으로
건국 준비와 좌우합작운동
그리고 남북합작을 주도한 지도자였다.
몽양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해
남북, 좌우로 분열된 나라를 통일하기 위해
끝까지 통일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몽양은 좌우합작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지만,
좌우 정치세력의 견제를 받아 성공을 이루지 못한다.
또한 몽양은 이승만 친미 세력과 친일 잔당
그리고 미군정청에 의한 암살 위협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위대한 애국투사였다.
이후 몽양의 정신은 6.15남북공동선언으로
몽양 여운형 선생의 남북화해와 남북협력의 높은 뜻은 피어났다.
미 군정기에 몽양이 남북을 오가는 것을 말리자,
몽양은 “당신들 손님 아니냐.
내가 집주인인데,
집주인이 안방 건넛방 가는 걸 왜 간섭하느냐”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남북이 꽉 막혀 있는 지금 이 시기,
용기 없는 민족에게 분발을,
다시 한번 희망을 주는 몽양 선생의 사자후(獅子吼)다.
지금 우크라이나 사태로 미국과의 격돌이 유럽을 넘어 전 지구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미국은 끝나가고 있다.
국내는 너무나도 유치한 윤석열 정부로 민중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 상황이다.
자주를 외면하고 평화에 역행하며
통일을 한사코 반대한 친미사대,
민족대결, 반민중적 이명박근혜 수구 정권의 말로는
누구보다 윤석열 정부가 잘 알 것이다.
몽양 선생의 일제 패망을 확신하고 ‘건국동맹’을 만든 선견지명과
남북을 넘나들며 우리민족끼리 남북합작하며
좌우를 포용한 자주와 민족대단결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4.19혁명과 촛불 혁명 같은 죽 쒀서 개 주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준비되지 않는 싸움은 진다!
반제자주평화애호 세력은 총단결하라!
“존경하는 통일애국투사, 몽양 여운형 선생님!
|
조국은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선생님의 조국 통일을 위해 걸어온 길을!
살아 있는 우리들은 분단의 원흉 미국과 일본에 맞서
우리 어깨 위에 지워진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의 과업을
우리는 절대 벗지 않고,
통일된 그 날까지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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