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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외교

8.15광복, 미국이 시켜줬나? 우리 힘으로 이뤄냈나?

8.15광복, 미국이 시켜줬나? 우리 힘으로 이뤄냈나?

 

기자명 강호석 기자

 

2022.08.14

 

광복절에 드는 의문 (5)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했다.

그런데 그날의 해방은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연합군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덕택에 주어진 선물일까?

아니면 우리 민족의 힘으로 싸워 얻어낸 전취물일까?

전자를 ‘타력 해방론’, 후자를 ‘자력 해방론’이라 부른다.

 

이남 사회는 타력 해방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이북은 자력 해방론이 절대적인 상식이다.

 

물론 자력 해방이라고 해도 우리 민족 자체의 힘만으로 일제를 물리쳤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2차 세계대전은 전 세계 파쇼국가와 연합군 사이의 ‘판갈이’ 전쟁이었기 때문에

당시 최강의 힘을 가진 국가도 단독으로 파쇼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연합군(미국, 소련, 영국 등)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독일에 함락된 프랑스나

일본의 식민지가 된 중국이 자력으로 해방했다는 주장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프랑스나 중국과는 달리 자력 해방론에 소극적일까?

 

우리 사회가 유독 자력 해방을 믿지 않는 이유는

조선인민혁명군(김일성 빨치산부대)의 항일무장투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1920년대 번창하던 항일독립군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시들해졌고,

오로지 조선인민혁명군만이 끝까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런데 이남 사회는 이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연히 자력 해방을 주장할 근거가 사라지고 없다.

 

타력 해방론이 대세를 이룬 또 다른 이유는 미군정에 빌붙은 친일파 때문이다.

 

일제에 타협했거나 투쟁을 회피했던 세력들은

‘어차피 해방은 미국이 시켜줬으니 독립운동 따윈 필요치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들의 과거 친일 행적을 합리화하는 수단과 논리로 활용했다.

 

이들은 8.15광복이 연합국의 승리가 가져온 선물임을 강조하면서,

항일독립군이 일제와 벌인 전투와 투쟁의 성과를 상쇄시키려 했고

, 그럼으로써 일제에 저항하지 않았던 자신들과

항일독립운동가들을 동일 선상에 놓으려 했다.

 

해방의 원동력을 무엇으로 보는가가 중요한 이유는

해방 이후 새조국 건설을 자체의 힘으로 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가르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이 우리를 해방시켰다면 새조국 건설도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미군정에 의해 친일파 척결이 중단되고,

미군정의 발표에 따라 38선 이남에만 단독선거가 실시되는 것을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반대했겠지만,

타력 해방론이 팽배한 이남의 현실에서 감히 미군정에 저항하지 못했다.

 

더구나 당시만 해도 3년 후에는 미군이 나갈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처럼 자력이냐, 타력이냐는 해방된 조국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인 문제로 작동했다.

 

그렇다고 근거도 없이 자력 해방론을 주장할 수는 없다.

자력 해방론의 기준은 일제와의 전쟁에서 당당한 주체로 참여해서 승리에 공헌했느냐?

특히 한반도에서 일제를 몰아내는 전투를 하고, 일제 통치기구를 분쇄했는가? 여부에 달렸다.

 

우리의 광복은 과연 자력 해방의 기준에 부합하는가?

 

광복이 오기까지 우리 민족은 쉬지 않고 일제와 싸웠다.

해방의 그날은 우연히 주어진 게 아니라

우리 민족의 피땀 어린 저항에 연합국의 승리가 더해져 이룩한 결실이었다.

 

3.1독립만세 이후 결성된 항일독립군의 봉오동전투(1920년),

청산리전투(1920년),

1930년대 들어 조선인민혁명군의 무송현성전투(1936년)

, 보천보전투(1937년),

간삼봉전투(1937년),

륙과송전투(1939년) 등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다.

 

특히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조선인민혁명군은 조국해방을 위한 총공격이 개시했다.

 

8월 9일 경흥요새 돌파전투, 훈흉 해방전투를 비롯해 웅기 해방작전,

나진지구 해방작전, 창진지구 해방작전 등

국내 진공 작전은 반일 전민항쟁의 불길과 함께 타올랐다.

 

당시 소련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이 한반도에 진격하자,

미군도 이에 질세라 한반도 진출을 계획했다.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일본은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다.

 

만일 소련과 조선인민혁명군의 진격이 없었다면

‘조선사수론’(조선을 끝까지 식민지로 남겨 두려는 일제의 종전협상 카드)을 주장했던 일본이

과연 한반도에서 철군했을까?

 
 

1,일본은 왜 8월15일에 항복했나?

기자명 강호석 기자

 

 2020.08.12

 

광복절에 드는의문 1

광복 75년,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다. 

반복된 강요로 굳어져버린 사색의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 3가지 질문에 답해 본다. [편집자]

 

(1) 일본은 왜 8월15일에 항복했나?

(2) 38°선을 왜 한반도에 그었나?

(3) 나라면 ‘찬탁’일까, ‘반탁’일까?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라디오 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이날을 우리는 광복절로 기념한다.

 

일제가 항복한 이유는 8월 6일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제는 원폭 투하 전인 7월 11일 미국에,

7월 13일 소련에 이미 항복할 뜻을 전했다.

 

7월 26일, 회담 중에 발표한 포츠담선언은 일본의 이런 항복 의사가 반영돼있다.

 

그렇다면 이미 항복한 일본에 미국은 왜 원폭을 투하했을까?

또한 일본은 항복한다는 공식 발표를 왜 8월 15일에 했을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이유

 

미국은 전쟁의 조기 종식을 위해 일본에 원폭을 투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 패망을 전후한 일련의 기록은 미국의 주장을 부정한다.

 

1945년 4월 5일 일본은 도조 히데키가 해임되고

스즈키 간타로가 수상에 올라 종전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일본의 종전 의지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일본군을 계속 섬멸한다.

 

6월 23일 오키나와가 점령되자 일본은 마지막 남은 전의를 상실한다.

 

7월 11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할 테니 천황제만 인정해 달라고 미국에 간청한다.

7월 13일 간타로 일본 수상은 종전을 선언하는 천황의 친서를 소련에 전하겠다고 공식 제안한다.

 

종전을 논의한 포츠담 회담에서 소련은 미국과 영국에 일본의 종전 의사를 전달하고,

7월 26일 회담 중에 일본의 무장 해제를 결의한 ‘포츠담선언’을 발표한다.

 

일본의 항복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미국이

군사 기지도 아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이유가

‘전쟁 조기 종식’을 위해서라는 미국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원폭 투하의 진짜 목적은 무엇인가?

 
▲미국은 1954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이탈리아에 이어 1945년 5월 8일 독일까지 소련에 항복하자,

2차 세계대전 전범국 중 이제 일본만 남았다.

 

테헤란 회담에서 독일 항복 3개월 후 일본 공격에 참여하기로 양해를 얻었던 소련은

이제 일본군 무장 해제에 뛰어들었다.

 

한편 일본마저 소련에 항복할 경우

전후 세계 질서가 소련을 중심으로 돌아갈 것을 경계한 미국은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다급하게 움직였다.

 

독일 항복 후 두 달여가 지난 7월 17일,

\포츠담회담(1945.7.17~8.2)에 참석하러 가던 트루먼 미 대통령은

전날 뉴멕시코에서 한 핵실험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 트루먼은 이 무기를 일본에 사용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처칠 영국 수상과 먼저 합의한 다음 7월 25일에야 스탈린 소련 서기장에게 이 무기의 존재를 밝혔다

 

. 이튿날 미국은 “신속하고 철저한 파괴(prompt and utter destruction)”를 언급하며

일본의 무장해제를 통첩한 ‘포츠담선언’을 발표한다.

 

아무리 굉장한 무기가 있더라도 실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라면 가치가 제한된다.

일본이 항복을 공식 발표하기 전에 투하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를 일이었다.

 

미국은 원자폭탄을 투하해 20여만 명의 민간인을 살상하고

약 100만 명에게 방사능 피해를 입히는 것으로 그 위력을 과시했다.

 

원자폭탄 투하로 미국은 전후 처리 협상에서 소련의 지위를 위협했고,

일본이 아닌 한반도에 38°선을 베트남에 16°선을 그어

국공내전 중이던 중국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뒤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만에 정박한 미군 전함 미주리호 위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시게미쓰 마모루 일본 외무대신.

 

일본이 항복 발표를 8월 15일에 한 이유

 

6일 히로시마 원폭투하, 8일 소련의 선전포고, 9일 나가사키 원폭투하에 이어

10일 일본정부가 포츠담선언 수락 의사를 연합국에 통보했다

. 단 하나 ‘천황의 통치권 계속’이라는 양해사항을 붙였다.

 

11일 번스 미 국방장관이 연합 4국을 대표해 일본에 답신했고

, 일본 정부는 14일 항복 통보로 답했다.

그 사흘 동안 양측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보여주는 자료는 아무것도 없다.

이 사흘 동안 일본은 마지막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 항복은 결정되었으나

언제 어떻게 항복하느냐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득실이 크게 달라질 상황이었다.

 

답신을 받아놓고 일본 지도자들이 미국과 흥정에 나서지 않았다면 직무유기다.

 

가장 큰 흥정 품목은 항복 시점이었다.

소련이 지분을 키우기 전에 서둘러 항복하는 것.
-김기협 ‘해방 일기’ 중에서

 

김기협 박사의 분석은 정확했다.

 

전후 미국은 일본에 천황제 유지를 보장했고,

731부대 세균전 비밀자료 등을 받고 전범재판에서 이들을 면제했다.

 

미국은 아시아 침략 전초기지 육성을 명분으로 전범기업들을 전폭 지원했다.

 

 

나라면 ‘찬탁’일까? ‘반탁’일까?

기자명 강호석 기자

 

2020.08.15

 
 

광복절에 드는 의문 (3)

해방된 땅에 외세가 또 우리를 통치한다는데 누가 찬성(찬탁)하겠는가?

그래서 ‘신탁통치’란 말을 처음 들으면 누구나 반대(반탁)하게 된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직후에는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의외로 찬반 논쟁이 격렬했다.

 

38선 이남의 여운형, 김규식, 김원봉

그리고 송진우 등은 찬탁,

 

이승만, 김성수 등은 반탁 대열에 섰다.

 

반탁에 앞장섰던 김구는

‘송진우 암살 사건’ 이후

미군정을 반대하진 않는다며 한발 물러섰다.

38선 이북은 대부분 찬탁이었다.

 

간단해 보이는 문제가 이처럼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 이유를 알아보자.

 

이승만이 찬탁에서 반탁으로 돌아선 까닭

신탁통치는 미국의 제안으로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미·소·영 외무장관) 회의에서 제안되었다.

 

이 회담에서 미국은 ‘군정 신탁통치 10년’을 제안했다.

그러나, 소련의 반대로 거부되고

“한반도를 조속히 독립시키기 위해 임시민주정부를 구성하고 이를 지원하는

미·소공동위원회를 두고, 5년 내에 한반도를 자주독립국가로 만들기 위해

4개국의 승인을 거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자신의 안을 관철하지 못한 번스 미 국무장관을 징계하고,

그 안을 끝까지 관철하기 위해 3상회의를 파탄낼 방안을 강구한다.

 

같이 한 합의를 대놓고 반대할 수 없게된 미국은 반탁 여론을 조작한다.

이렇게 발생한 사건이 바로 ‘동아일보 오보사건’이다.

 

‘동아일보 오보사건’이란?

3상회의 결정 사항의 공식 발표는 12월 28일이었으나,

미국은 25일 AP 통신에 워싱턴발 가짜 정보를 흘렸다.

26일 동아일보는 이 속보를 대서특필했다.

 

미국이 흘린 가짜 정보는

“소련이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었다.

 

▲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1면 기사. 기사 내용에는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독립문제 -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독립주장'이라 쓰여있다.

 

이 뉴스가 보도되자 좌우 가리지 않고 3상회의 무효를 주장하는 반탁 여론이 불붙었다.

 

뒤늦게 소련을 통해 가짜 뉴스를 확인하고 다수가 찬탁으로 돌아섰지만

, 이미 찬탁론자들은 민족을 배신한 좌파 빨갱이로 전락하고 있었다.

 

이 때 철저한 친미파 이승만은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를 찬성하다가

돌연 반탁으로 돌아서 친미반소 세력을 결집하는 기회로 이용했다.

 

좌파는 찬탁이고 우파는 반탁이었을까?

 

한반도를 아시아 침략의 전초기지로 생각한 미국은

38°선을 분할 할 때부터 군정에 의한 신탁통치 구상을 무르익혀왔다.

 

해방 후 미국의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을 최초로 국내에 전한 것은 1945년 10월 23일 매일신보였다.

 

미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의 말을 인용한 기사로, 당시 좌익과 우익 모두 반대 의사를 밝혔다.

 

‘오보 사건’ 이후 소련을 따르는 좌파는 찬탁,

미국을 따르는 우파는 반탁이라는 식으로 국론은 분열했다.

 

하지만 중도우파인 김규식을 비롯한 정통 우파 송진우 등

이승만의 반탁 몰이를 거부한 우파 찬탁론자도 대거 등장했다.

 

‘찬탁 좌파, 반탁 우파’ 논리는

실상 이승만의 친미세력 결집용이자

정적 제거용에 지나지 않았다.

 

▲1946년 3월 20일부터 5월 6일까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주한미군사령관 존 하지 중장과 소련측 수석대표 테렌티 스티코프 중장의 모습이 보인다.
 

'반탁'을 부추겨 '찬탁'을 관철한 미국

반탁 주장이 거세지자 소련은 ‘10년 군정통치’를 제안한 미국의 초안을 공개해

여론 호도를 막는 한편 3상회의에서 합의한 대로 임시민주정부 구성에 박차를 가한다.

 

뒤로 반탁 여론을 흘려 3상회의 합의를 파탄 내려던 미국은

결국 1946년 3월 26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에

아놀드 소장을 수석대표로 보내게 된다.

 

그러나 미국은 3상회의 합의 파행 공작을 멈추지 않았다.

 

미국은 임시민주정부 구성을 두고 억지를 부렸다.

임시민주정부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구성이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고

반탁 대열에 선 단체나 인사가 구성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기초적인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승만, 김성수 등 소련에 대항해

미국의 이익을 챙겨줄 반탁인사의 임시정부 참여를 고집하면서

, 대표적인 민주단체인 회원 60만의 전평

, 80만의 조선부녀동맹,

65만의 조선청년동맹,

300만의 전농 등은 제외했다.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대로 한반도에 임시 민주정부가 수립되어야

38선을 철폐하는 등 남북 통합을 논의할 수 있다는 합리적 입장을 견지했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소련과 미국의 갈등은

미국이 38선 이남에만 단독선거(1948.5.10.)를 실시함으로써 완전히 파탄 나고 말았다.

 

 

미군점령, 일본군 무장해제가 목적이었을까?

 

기자명 강호석 기자

 

2021.08.15

 

광복절에 드는 의문 (4)

 

8.15 직후 3일간 휘날린 태극기

 

흔히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을 발표해 광복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맥아더 ‘일반명령 제1호’(한반도 38도선, 베트남 16도선 분할)와 항복문서는

8월 11일 3부조정위원회 회의에서 확정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은 몽양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통치권 이양을 시작했고

, 8월 15일 조선총독부 건물에는 의연히 태극기가 휘날렸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관이 보낸 미군 선발대는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모든 체제를 변경하지 말고 계속 유지하다가

정식 항복할 때 일본 통치기구를 그대로 미군에 인계하라”고 통고했다.

 

미국의 통고를 받은 조선총독부는 8월 18일 오후

여운형에 대한 행정권 이양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이미 인계한 신문사와 학교 등도 다시 접수했다.

이런 조치에 따라 조선총독부에 게양된 태극기도 다시 일장기로 바뀌었다.

 

▲1945년 9월 9일 미 점령군이 조선총독부 국기 게양대에 걸린 일장기를 성조기로 교체하고 있다
. [사진 : 주한미군 페이스북]

 

조선총독부와 건국준비위원회

 

8월 20일 미군 B29가 서울 상공에 나타나 웨드마이어 장군 명의의 삐라를 시내에 살포했다.

 

내용은 조만간 미군이 진주한다는 예고였다.

 

미국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건국준비위원회는

통치권 이양을 완강하게 전개하는 한편 임시정부수립에 박차를 가한다.

 

이에 당황한 조선총독 아베는 8월 28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에게 한반도 상황을 전하고

치안유지권을 요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이에 다음과 같은 즉각적인 회답이 왔다.

“귀하는 우리 군대가 책임을 떠맡을 때까지 38선 이남의 질서를 유지하고

통치기구를 보전할 것을 지시한다.

나는 귀하에게 그 곳의 질서를 유지하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권한을 부여하며 지시하는 바이다.”

 

이를 받아본 아베의 회신은

“귀하의 명철한 회답을 받고 본인은 지극히 기쁘다”라는 것이었다.

-분단 전후의 현대사  <브루스 커밍스 외 저>

 

 

▲ 미 미조리호 함상에서 일본대표로 시게미스 마모루 외무대신에 이어 우메스 미치로 육군참모총장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이 광경을 맥아더 미 극동사령관이 지켜보고 있다
(도쿄, 1945. 9. 2.). [사진 : 맥아더기념관]

 

조선인민공화국과 미군정

 

9월 2일 미군 미조리호 함상에서 일본 육군참모총장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 같은 시각 미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 명의의 포고 삐라가 다시 서울 상공에 살포되었다.

 

9월 6일, 미군 협상단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여 조선호텔에서 조선총독부와 예비교섭을 시작했다

. 그날 저녁 건국준비위원회는 대표자회의를 열어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로 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창건한다.

 

이로써 38선 이남에 해방 후 첫 정부가 생겼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첫 사업으로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친일파 척결에 나섰다.

 

그러나 운명의 9월 8일,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 24군단 7만여 명의 미군이

38선 이남을 점령(occupy)했다.

 

‘조선 인민에게 고함’으로 시작하는 맥아더 포고령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최고통치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된다.

 

본관 및 본관의 권한 하에 발포한 일체의 명령에 즉각 복종해야 한다.

점령군에 반항하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엄벌에 처한다.”라는 내용을 담았다.

 

광복을 맞이한 우리 민족이 스스로 세운 임시정부인 조선인민공화국에 가야 할 통치권이

미 점령군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미군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임시정부를 구성했던 여운형 부주석과 김구 내무부장은 암살되고

허헌 국무총리는 미군정의 등살에 월북하고 말았다.

 

결국 이승만만이 조선인민공화국을 버리고 미군정에 편승해 대통령 자리를 꿰찼다.

 

미 점령군은 일본군 무장해제가 목적이었을까?

 

8.15부터 미군정을 선포한 9월 8일까지 미국이 벌인 치밀한 한반도 점령계획은

미군이 단순히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순수한 목적으로 진주하지 않았음을 웅변하고 있다.

 

특히 8월 14일 청진과 나남에 소련군이 상륙하여 일본군을 몰아냈으며,

16일에는 훨씬 더 남쪽인 원산에서 상륙작전이 감행되었다.

 

이러한 진공 추세로 볼 때 소련군이 일본군 패잔병을 한반도 전체에서 몰아내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반면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서 1천Km 떨어진 오키나와 주둔군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미국이 38선 이남의 일본군 항복이 목적이었다면

같은 연합군인 소련에 맡기고 굳이 한반도에 진주하지 않아도 된다.

 

이뿐만 아니라 미국의 만류만 없었다면

일본은 건국준비위원회로의 통치권 이양을 거부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당시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일본 통치배들은 한시라도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고

, 건국준비위원회는 빠르게 통치권 이양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이 조선인민공화국에 가야할 통치권을 찬탈한 이유는

친미 정권을 세워 한반도를 영구 점령하기 위해서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당시 국공내전 중이던 중국에 국민당을 지원해

친미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던 사실에서도 이런 추측은 가능하다.

 

무엇보다 미군이 지금까지 이땅에 주둔하며 국군을 지휘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 무기 강매와 군사훈련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챙기는 오늘의 현실이

광복 당시 미군의 진주 목적을 방증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