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과학

[명상법] '쿤달리니'와 '칠성신앙', 그 수행자에 대한 보고서(1)

 

 

[명상법]
'쿤달리니'와 '칠성신앙', 그 수행자에 대한 보고서(1)

 

 

깨달음의세계

 

 

 2010.10.08. 17:50

 

 

 

쿤달리니 수행자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기 전에 먼저 이 '쿤달리니'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 참역사적 뿌리는 어디인지 살펴본다.

 

 

먼저, '쿤달리니'라는 것은 무엇인가,

 

구구한 수많은 자연과학적인 분석과 해석 그리고 정신세계에서는 주관적인

상황을 얘기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알듯 말듯 너무나 장황하다.

 

 

그래서 그 핵심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쿤달리니라는 것은 인도에서 출발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 역사는 서기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요가수행의 한 방편으로 알려지고 있다.

 

요즘 요가라는 것이 건강을 위한 방편으로만 여겨지는 것이 사실인데

 원래는 인간상태를 초월하는 깨달음을 그 궁극적인 목표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열반(니르바나)=득도=각성=붓다=그리스도=신선' 등으로 표현될수 있겠다.

 

쿤달리니 명상 수행은  우리의 성적욕망을 종족번식과 쾌락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이 성에너지를 인간의식의 변형, 혁명을 위해 쓴다고 보면 될 것이다.

즉 위해서 언급한 득도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경험자들은 뱀이 우리의 생식기와 꼬리뼈 사이의 중앙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뱀으로 형상화 하였고

이 뱀은 잠들어 있는데 쿤달리니 명상을 통하여 각성시켜 아래 그림과 같이 

우리 몸 각 부분에 존재한다는 샘(센터=또는 단전)을 통과하면서

결국 머리 정수리까지 치솟아 올라 밖으로 빠져나가게 하는 것을 말한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명상법이 존재한다.

크게 가부좌자세처럼 하는 정적인 명상 그리고 몸을 흔들면서 하는 동적인 명상이다.

이 쿤달리니 명상은 동적인 명상 수행법도 있다.

필자의 체험으로는 명상은 관념이 아니라 생생한 체험이다.

 

비록 주관적이라고는 하나 체험임에는 분명하고

그 체험은 정신적인 면에서는 의식을 진화시키고 각성시키며

육체적으로는 건강으로 인도한다. 한마디로 삶을 변화시킨다.

 

 



다음은 이 쿤달리니 체계는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먼저 이 쿤달리니 기운을 뱀으로 형상화 한데 주목해 본다.

우리의 태초의 전통뿌리문화 가운데 하나가 뱀이다.

한겨레의 조상이으로 알려진 '태호복희' 그림에도 뱀이 나온다.

 

복희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여와와 복희사진

 

 

복희(伏羲 / 伏犧) 또는 포희(庖犧)는 중국 삼황 중 하나이다.


복희는 태호(太昊/太皞)로 불리기도 한다.

 

 '복희'는 희생(제사에 쓰이는 짐승)을 길러 붙여진 이름이다.

성씨는 풍(風)으로 전해진다.

그는 수인씨(燧人氏)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뱀의 몸에 사람의 머리를 하였다.

 

 

사마천의 《
사기》에는 동이족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팔괘(八卦)를 창제하고, 이로부터 신의 계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이는 《주역》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도교에서는 그를 동방의 천제라 일컫는다. 또한 글자를 만들었다고 믿어졌다.[1]

역경에는 팔괘를 처음 만든 사람으로 나오며, 백성에게 수렵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더욱 확실한 것은 우리 무속의 중요한 상징물로써 뱀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지금 제주도의 무속에서는 여성성을 띤 7분의 뱀을 형상화한 처녀(선녀)가 등장한다. 

 

상체는 여성인데 하체는 뱀꼬리를 하고 있다. 

이른바 '사신(蛇神) 칠성 본풀이' 로 전해지고 있는데

학계에서는 이 뱀신앙도 밖에서 들어온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데

역시 사대주의 노예사관의 중독을 여기에서도 확인된다. 

 

인도 문명은 3사상과 더불어 확실하게 또 하나의 한국이라고 할 만큼

동북아시아 한문명을 수혈받아 탄생한 것이라는 것은 우리까페 '한겨레참역사' 방에 게시물이 나온바 있다.

마찬가지로 7사상이 이 쿤달리니 명상 수행에서도 각 샘이 7개로 구성되어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북두칠성,  7성신앙이 우리의 하나님 사상과 동급이라는 것은 이미 우리까페 여기저기에 자세히 게재되어 있다.

 

아득한 옛날, 지금까지 밝혀진 고도의 문명으로,

만주 흑룡강성 지역에 19만4천평이나 되는 칠성제단을 쌓고 7성 하나님께 제천 '굿' 을 한 유적이

 서기1987년에 중공당국에 의해서 발굴 되었는데

무려 6천5백년전의 것이다.

인도문명이 아무리 올라가봤자 5천년 남짓한 것으로 세계사는 말한. 

 

 

이 쿤달리니 수행은 7단계의 샘을 거쳐야 수행이 완성되고 '성통공완(性通功完)' 이 된다는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북두7성에도 각 별에 각기 다 다른 뜻이 있는데

우리의 생사, 수명, 복락을 주관하며 첫째 별인 천추성(天樞星)은 우주의 원리,  하늘의 도리를 관장한다고 한다.

 

북극성과 함께 하나님의 별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수 있다.

그렇다면 쿤달리니 수행으로 7샘을 통과한 자는 하늘의 원리, 우주의 원리에 통달했다는 것이 되고

마고성 시대의 신인합일의 '해혹복본' 을 완성한 것이고 곧 득도를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우리의 삼사상에 담겨있는 뜻을 똑 같이 인도에서 사용하는 문화가 널려 있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수행방법에서도 우리의 7사상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이 쿤달리니 수행의 핵심도 결국 우리의 영향을 받았다고 밖에 달리 해석이 안된다.

 

 

참고로 북두칠성 첫번째 별인 천추성 양 옆에는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보補성 과 필弼성이 존재한다고 한다.

 

우리 조상님들은 아득한 옛날 현재 처럼 초정밀 천체망원경도 없던 시절

어떻게 이 별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었을까, 한단고기에는 '자부선인'이라는 신선이 등장한다.

 

 

이 분은 지구밖 우주를 자유 자재로 왕래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엘리아데의 '사먀니즘'이라는 책에서도 북방 시베리아 무당들은 우주를 자유자재로 왕래한다고 나와 있다.

 

 

이 처럼 수행을 통해서건 천부적이건 간에 현대 기독교적 서양 물질문명의 시작에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원시인들이 '우가 우가' 하며 산다고 세뇌된 아득한 수천년

아니 수만년전에도 고도의 정신문명으로 인하여 현재 육안으로는 발견되지 않는 '보필'성을

영적인 눈으로 확인 했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 시대에도 '쿤달리니' 같은 수행은 필요하다.

 

자, 이제 그 신비하기도 한 쿤달리니 수행자의 신비체험 속으로 여행해 보자, 

 

외국인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이 그런 체험을 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호기심을 자극할 것으로 본다.

우리 까페에서는 지난해까지 모임을 하면서 

이 '쿤달리니 명상' 을 역사강의를 하기전에 한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조상님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 것이고

그 삶의 일부분인 건강과 정신혁명의 수행생활도 있었다고 볼 때, 

이러한 명상을 통해서 조상님들이 누렸던 정신세계도 체험해 보는 것도

산 역사 교육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따라서 향후 역사강의가 있다면 이 쿤달리니 명상 편성이 다시 부활하기를 꿈꿔 본다.

아래 글이 많이 길기 때문에 두차례에 걸쳐서 게시한다.

 

 

도움자료: 7성 신앙에 대하여는 깨어있는 푸른역사 삼태극의

               '삼신할미(조성제 선생님)'의 자료를 참조 했음을 밝힙니다.

 

 

깨어있는 푸른역사 삼태극  http://cafe.daum.net/mookto

 

 

 

 

 

 

 

 

낭심부분에 제1샘의 표시가 있고 그 위로 정수리까지 도합7개의 샘이 표시되어 있다.

 

 

위 그림은 태호복희 그림을 연상시킬 정도로 유사하다.

 

 

 

 

 

 

 

 

 

아래 자료 출처:  http://cafe.daum.net/lifeandzen

 

 

 쿤달리니 수행자에 관한 보고서1

 


 이번 달에는 강원도에 계신 한 밀교 수행자를 취재하려 하였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지난 여름부터 접촉을 시도했는데 이번에는 이루어지겠거니 하고 소식을 기다렸지만 역시 허사로 돌아갔다. 밀교 수행의 세계를 대체하기에 걸맞는 부분도 있고 해서

한 쿤달리니 수행자를 대신 취재해 보기로 했다.


 

 예전에 명상 모임에 갔다가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쿤달리니나 차크라 에너지에 대해서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놀란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아, 나한텐 언제 쿤달리니가 일어나나?’ 하는 식의 얘길 곧잘 듣게 되었던 것이다.

 

 

 쿤달리니란  탄트라 요가 문헌에 따르면 

 “척추 아래 끝에서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에너지”이며,

서구의 한 정신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정신 심령 에너지의 한 형태로서 ‘의식 에너지’라고 한다.


 

척추 밑에 잠자고 있던 이 에너지가 활성화되면 보통 일곱 개로 알려진 에너지 센터를 통과하게 되는데

 정수리에 그 마지막 종착지, 우주적인 의식의 자리가 있다고 한다.

거기까지 모두 경험한 사람은 90% 가까이가 궁극적 깨달음이라고 불리는 것,

사마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종적인 개화를 성취하게 된다고도 한다.

 

 


 현대 인도의 한 경험자에 따르면 “인간 의식이 일반적인 한계를 초월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잠자고 있는 센터가 활성화되어 보다 강력한 심령에너지가 척추의 밑에서부터 머리로 솟아올라야만 한다.

 

이것이 현재 인간에게 내재된 진화추진력의 마지막 단계이다.

인간의 뇌척수 조직은 급격한 변화를 거쳐야만 하며,

그래야만 의식이 지성의 최고 단계마저 뛰어넘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 에너지가 활성화되기 위해선 수많은 생에 걸쳐 수련을 해야 된다는 말도 있지만,

앞의 정신심리학자의 임상 관찰에 의하면 서구의 정신병원 환자 중 많게는 80% 가

이와 관련된 증상으로 인해 억울하게 수용되어 있다고도 한다.

 

 

아무튼 명상을 하고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지대한 관심사인 것 같다.

동양과 서양의 접목을 시도하며 인간성의 다른 차원을 탐구하는 과학자나 일반인에게도 중요한 문제임에는 분명한데 필자는 몇 년간 명상 계통의 일을 하면서 쿤달리니와 관계된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났었다.


 

 우리 나라에도 쿤달리니에 관한 한 백과사전과도 같은 분이 있는데

그 과정의 마지막 관문마저도 통과하였다든지, 본인 스스로 다 열렸다거나, 그런 것 말고도 다 해보았다,

당신은 어디까지 열렸고 당신은 어디를 열어야 되니 이런 수행법을 하는 게 좋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았었다.

 

 


  하지만 필자로선 그다지 신빙성이 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기실 지금부터 쓰게 될 사람 때문이다.

필자가 명상의 명자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 그러니까 한 십 칠팔년 전  우연히 알게 된 분이다.

 

 

필자는  그에게 일어난 비상한 상황을 곁에서 직접 보게 되는 행운이 있었다.

당시엔 그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이런저런 책을 뒤지다가 그것이 쿤달리니 폭발과 관계된 거라고 짐작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몇 년에 한 번씩 그를 만나곤 하였었다.

 

 

그는 대체로 명상 얘기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그저 술을 몇 잔 걸치고 세상살이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다.

 

자신 또한 길을 가는 사람일 뿐 할 얘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때 필자는 그를 소재로 글을 한편 쓰고 싶었으나 계속해서 무위로 그쳤다.

그에 관한 자료를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워낙 말이 없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필자가 짐작하기로 그는 쿤달리니의 모든 관문을 통과한 것은 아니었는데 바로 그 점이 흥미로웠다.

최초의 폭발 이후 그가 어떤 변화를 겪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번에는 특정한 목적을 띠고 찾게 되었는데 전 주환 선생의 경우처럼 공식 인터뷰는 아니다.

필자가 요즘 명상 잡지 만드느라 고전하고 있다며 사정을 얘기하자   

 

 “알아서 하시게. 당신이나 나나 다를 바가 뭐가 있나?"

 하며 전처럼 친구로서 이야기하자고 한다.

 

녹취나 촬영, 별도의 기록은 없었으며 이 회에 걸쳐 분재하기로 한다.

이름은 그냥 수행자라고 해 두었다. (이하 수=수행자/ 윤=필자)


 

윤: 당신은 어쨌든 축복받은 사람이다. 정말 나와 처지가 같다고 생각하나?


수: 글쎄, 나는 당신만큼 행복한 인간이다. 그리고 당신만큼 불행한 인간이다. 그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윤: 예전에 당신이 ‘꽃사슴 잡으러 산에 갔다가 사자를 만났더라. 돌아올 수 없는 길

    혼자인 줄 몰라라.’그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무슨 뜻이었나?


수: 인간의 마음 혹은 의식 그 밀림 깊은 곳에는 우리를 한 순간에 삼켜 버리는 사자가 산다.

 

사람들이 명상 같은 것을 하면서 자기 자신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할 때

그 속에서 아름다운 사슴 한 마리를 붙잡고는 나와 버리려고 하지만,

그러면 만족스러울 것 같지만 실은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산이 깊어 갈수록 그 속에 어찌 사슴만 살겠나?

사나운 늑대도 있고 그보다 더 무서운 사자도 있고.

나는 아직 늑대 정도한테 물린 것에 불과하다.

 

 

윤: 명상이란 일종의 진정제는 아니다, 라는 뜻 같다. 그런가?


수: 맞다. 호기심이 아닌 탐구, 자기 자신이 된다는 일은 그렇게 어설픈 일은 아니다.

     적당한 지점에 멈춰 서서 타협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윤: 늑대는 무엇이고 사자는 무엇인가?


수: 늑대든 사자이든 우리가 있는 세상에서 저 너머가 있다는 것을 알기는 어렵다.

    우리는 다 같이 모르기 때문에 이것이 맞다 아니다, 서로 티격태격하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자신이 정말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은

 남들에게 전해 주기 어렵다.

 

그런데 체험을 떠난 마음 밖의 세계나 일상과 상식의 차원을 넘어선 경험에 대해서

누군가 그것을 말로 전해 줄 수 있겠는가? 

나는 모르며, 착각하지 마라, 나는 진짜 모른다, 아는 자는 말이 없다.

 

 

윤: 하지만 당신은 모른다면서도 사자라는 말을 썼다. 무슨 뜻으로 한 건가?


수:(웃음)불가지의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마라.

    그것들의 존재야말로 아마 우리가 가장 원했던 그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에 남아 있는 욕망의 찌꺼기들과 두려움이 문제였다.

그러면서도 화살은 이미 내 시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것이 어디로 갈지, 내 인생을 어떻게 통제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과거로 돌아갈 수도,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다.  


윤: 늑대란 당신에게 쿤달리니 현상 같은 것이 일어난 것을 뜻하기도 하나?


수: 그렇다. 꼭 그런 것은 아니라도 명상이나 수행을 하다보면 어떤 일이든 일어나기 마련이다.

    당신도 그렇지 않나?

 

쿤달리니든 소주천, 대주천, 환정보뇌든  그것이 어떤 사인이야 되겠지만 그 자체에 매달리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신비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원래 누구나 있는 것 아닌가?


윤: 당신이야 그런 일을 경험했으니까 그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도 못하다.


수: 내가 보기에 쿤달리니 속에 특별히 영적인 것이란 없다.

    실은 영적인 것이란 도무지 없다. 무엇이 영적인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 나로선 모르겠다.

 

많은 성자들의 말과 경전들이 있다.

깨달음이니 진아니 영적이니 그것들은 또 다른 환각일 뿐이다.

누군가 아무리 그것들을 많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아무 것도 불태우지 않은 것이다.

인생의 수많은 일들과 실패야말로 도이고 수행인데 어쩌란 말인가?

 

영적인 각성이라는 것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의식적인 진화라기보다는

진화 자체가 인간에게 강제되어 있다.

그 스펙트럼의 어떤 국면도 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윤: 삶 자체를 능가하는 에너지는 없다는 뜻인가?


수: 나는 오히려 이 인생보다 신비한 에너지는 없다, 라고 말하고 싶다.

     쿤달리니란 먼저 어떤 신령스러운 별개의 힘이라기보다는 인간 현실의 진상,

      그 상징이기도 하다고 말하겠다.

 

물론 대부분의 쿤달리니는 잠들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일단 각성되면 그 에너지는 계속해서 위를 향해 상승한다.

어느 센터에서 막히게 되면  온 힘을 모아 장벽을 해소하고 다시 위의 지점으로 나간다.

 

올바른 인생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멈춰 있지 않으며 계속해서 깊어져 간다.

그것은 매일매일 새롭고 매일매일 변화한다.

그것은 당위나 목표가 아니라 삶의 에너지가 가진 현상 자체이다.

  

윤: 하지만 잠들어 있는데도 자신은 깨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윤: 자기기만은 삶의 전형적인, 그리고 아주 오래된 방법이다.

    비난하거나 혐오하거나 가책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쿤달리니 현상을 강요하고 조작해내듯 대부분은 자신의 삶을 기만하고 있다. 기껏해야, 조직의 목표, 게임의 목표에 지나지 않는 것,

외부로부터 주어지고 강요된 목표를 위해 일생을 허비하며 위로한다.

그런데 진정한 일은 내면에서 일단 일어나면 절대 꺼지지 않는다.


윤: 진정한 일? 어떤 일 말인가?


수: 흠. 봄이 오면 풀은 스스로 푸르네, 그런 일이다.


윤: 좀 어렵다.


수: 우리가 흔히 나의 어떤 것이 죽어갈 때 내면에서 빛이 나타난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런데 이 빛이란 단순히 정신적이거나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고 말 그대로 진짜 빛이다.

 

그 내면의 빛이란 우리가 빛이라고 알고 있던 어떤 범주도 넘어서 있지만 진짜 빛이다.

그것은 온통 빛이고 온통 하얗고, 온통 그것이며 눈부시게 맑고 금강석처럼 단단하며 번쩍거린다.

그 빛, 아니면 어떤 불꽃을 단 한 순간이라도 일별하는 것, 그런 경험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음 생에서도 타오른다.

쿤달리니가 되었든 다른 무엇이 되었든 모든 것은 이 삶 속에 있는데

일단 잠에 빠진 자신을 깨우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선가 시작을 해야 한다. 어디선가 잠들어 있는 자신을 깨워야 한다.

그러면 그 다음의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명상이나 수행을 하는 것은 아주 효과적이다.


 

윤: 좀 구체적으로 얘기해 달라. 쿤달리니 에너지에 관한 많은 책들과 체험기가 있는데

      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수 :나도 끝까지 가본 것은 아니므로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부정확한 얘기들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빌리고 짜깁기한 얘기들, 공상과학소설들.  

 


윤: 예를 들면?


수: 음. 신지학 같은 것이 그랬다. 그들 자신도 모르고 하는 것 같은 중요한 얘기들도 있지만

    명상에 관한 한  신지학 대가들이란 대개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기독교적 조건화 때문인가?

 

 


 리드비터만 하더라도 자기가 무슨 대마스터의 지도 아래 쿤달리니를 사십 며칠 만에 완성했다며

 소위 전문가들을 상대로 공갈을 푼다.

또 자기가 전생에 그리스 신비학회 일원이었는데 전생 투시를 통해서

그때의 지식들을 일러주노라 이런 식으로 떠드는데 나로선 새빨간 거짓말이다.

 

 

크리쉬나무르티가 득도를 하기 전에 겪었던 현상들에 대해 신지학회 회장인 애니 베산트건 리드비터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멍청히 있기만 했었다.

그 많은 지식으로도 왜 크리쉬나무르티가 저러고 있는지 한 마디도 설명할 수 없었다.

(이는 오래전 번역된 크리쉬나무르티 전기에 보면 나오는 내용이라 한다)


 

 우리 나라에도 무책임한 사람 많다.

쿤달리니 체험은 물론  명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체험은 자기가 다 해본 것처럼 책에 써놓은 사람도 있던데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것에 관해서는 다들 그렇지 않나?

내 경험으론 비의적인 것에 관한 한 오쇼만한 인물이 없다. 그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윤: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신뢰할 수 없는 부류에 들어갈 수 있다.


수:(웃음) 자신이 경험한 것 이외엔 아무 것도 믿지 말라. 

 

 체험이나 자기 과거에 대해서 이랬었다 저랬었다 아무리 떠들어봐야,

그것이 신비적 체험이든 아니든  하나의 허상에 의해 재정의되고 조립되고 있는 허상의 파편들이다.

어떤 경험이 있었다면 그냥 입을 다무는 게 좋다.

그리고 스스로가 침묵하지 않는 경험이라면 그다지 중요한 경험도 아니다.


윤: 아까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에너지,라고 말했다.

      그에 관한 당신의 경험에 대해서 말해 달라.


수: 어떤 경험 말인가? 그것 자체도 꿈이고 묻는 당신도,

     듣고 있는 나도 또한 꿈이 아닌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질 덧없는 꿈.


 

여기서 좀 장황하긴 하지만 필자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얘기해 보겠다.

 88올림픽이 열리던 해이거나 그 다음 해 여름이었던 것 같다.

강화도의 한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석모도 보문사에 바람을 쐬러 갔다가 뱃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그곳 어시장의 한 술집에서 독작을 하다가 비슷한 처지의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합석을 하게 되었다.

어쩌구 저쩌구 금새 친해졌다. 호탕은 하지만 

속기나 뻥이 심해서 술 기운이 아니라면 잘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그 중 한 사내가 눈길을 끌었다. 빡빡 머리 때문에 나이를 알 수 없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그를 어렵게 대하는 것도 그렇고 필자는 그가 처음엔 스님인 줄 알았다.

 

 


 어디 계십니까? 하고 공손히 물으니 서울 삽니다. 서울 어느 절에 계시는데요? 난 그냥 보통 사람입니다.


 필자가 속으로 (흠, 이거 소설 책에서만 읽은 무슨 선승이나 기인 아닌가 하며)

가장 큰 고민이 무엇입니까? 하니, 고민이랄 게 없습니다.

무슨 생각하십니까?  생각 별로 안 합니다. 문제는요?  문제도 없고 궁금한 것도 없고 그래요.


 

 술기운이 사람 잡는다고 필자가 계속해서 물었다.

왠지 가방끈도 길고 공부도 많이 한 듯 보여서, 본인이 생각하시기에 자신은 그릇의 크기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쯤해서 그와 같이 있던 사람들이 어디 좋은 데(색시집 같은 곳)를 간다며 우르르 몰려 나갔다.

필자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자리에 남아 왜 저런 사람들과 어울리시죠?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은데?

하니 그런 말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하였다.


 

 묘하게 정이 가는 사내였다. 둘만 남게 되자 마치 오랜 만에 만난 옛친구나 선후배 사이 같았다.

그도 술이 거나하게 돌자 점차 말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고리를 찾기가 힘들었다고 말했었다. 그것뿐이었다.

다음 해 그 다음해도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예전에 지녔던 목표들이란 쓰레기통에 잘게 찢어 버린 서류뭉치를 되살린다는 것처럼 번거로운 일이었고

 아무리 찾고 싶어도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그런 일이 되어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대신에 어떤 진공 상태가 있었다.

참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진공 상태.

자신과의 어떤 관계라고 할 만한 것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더라도 뭐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스스로에게 절망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었을까?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필자는 왠지 착잡해져서 계속해서 술을 퍼마셨다.

 

한때는 그의 전부였던, 그의 영혼 깊은 곳을 얼어붙게 하거나

뜨겁게 만들었던 사랑을 잃은 고통 뒤에 오는, 혹은 당초에 그의 목표였던 것을 완전히 박탈당한 뒤의

슬픔 끝에도 찾아오는, 아주 깊은 고통 뒤에도 영혼이 파멸하지 않고 언젠가는 빛처럼 환하게 웃음지으며 사랑을 보내는 그런 것. 그런 걸 맘속에 품고 있었단 말인가?


아무튼 사내는 아무리 생각하고 따져본들 자기 자신은 절망을 한다든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는다든지 하였던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냥 ‘관계’라는 걸 세울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날  명상이란 걸 해보았다고 한다. 생각지도 못한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설명하지 못했다.


 

“당신도 일단 앉어. 그냥 죽었다치고 앉어.”


그렇게 필자에게도 명상을 권했다. 움직이면 죽는다,

쿨쿨 자고 있는데 집안 가득 불길이 치솟는다,

눈 똑바로 뜨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앉아 보라는 것이다.


 

잿빛 사고에 익숙했던 필자에게는 뜬금없는 얘기였다.

그래도 필자 주변에는 명상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실은 그 사내보다도 먼저,

 두어해 전에 이미 명상을 한답시고 잠시 쏘다닌 적도 있어서 사내와 필자는 한층 친해졌다.

어떻게 여인숙에 들어갔는지 모를 정도로 엄청나게 술을 마셨다.

그도 필자도 담요와 요 위에 노란 물이 나올 정도로 토사물을 쏟아내었다.


 

다음날이다. 정오쯤 되어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전등사에 들렸다가 버스 터미널로 가는 중이었다.

 

  맑게 개인 허공을 번쩍번쩍 비추고 있는 햇볕은 투명하고

섬세한 금속질의 광택을 머금고 솜사탕처럼 몸에 감겨들었다.

 

꽃들과 나무들은 자기 앞을 스쳐 가는 사람들에게 얘기를 건넬 듯 말 듯도 하였다.

그가 창백한 얼굴로 ‘안 되겠는데, 안 되겠는데...’

중얼거리며 몇 번인가 잠시 멈추다 말다 하며 필자를 뒤따라왔다.


 

  같은 버스에 올라타서 그를 보니 안색이 몹시 창백하고 이마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는데

 건너편 좌석에 따로 앉은 그가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어?”

 

 그는 무언가에 사로잡혀 약간 당황해 하는 듯하였다.

필자가 다가가 부축하려 하자 버스에서 당장 내리자고 하였다.

필자는 그가 구토라도 하는 줄 알고 급히 버스를 세웠다.

 

 

 어느 한가한 시골 마을 정류소에 내리자마자,

 “힘센 뱀들이 뱃속에서 목구멍 위로, 머리로 기를 쓰고 올라오는 것 같애.”

  그리고는 바로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하였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뜨는데 한순간 무시무시한 안광이 쏟아져 나온다.

 

 

 이내 눈을 감고 허리를 곧게 펴며 자세를 바로 한다. 삼분 여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필자는 그가 갑자기 간질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줄 알았다. 너무 갑작스레 일어났다.

아니 어느 순간부터 시간의 흐름이 끊어져 버렸다.

그의 숨소리가 차츰 거칠어지더니 사람의 그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곧장 격렬하게 변했다.

 

 

사지가 뒤틀리듯 경련을 일으키며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져 갔다.

엄청난 전압이 그의 몸에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괴물. 미친 주술사 같은, 발광하는 것 같은 숨소리,

억센 힘이 온몸을 조이고 있는 듯 부들부들거리는 사지와 몸체,

심장의 피가 혈관을 뛰쳐나와 마구 흐르고 뒤집히는 듯 불끈거리는 핏줄들.

시시각각 변해 가는 안면의 근육들. 사람의 얼굴이 그렇게 많이 변해 갈 수 있을까? 

 

그러다가 그의 경련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자세를 고정시키며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따금 굉장한 황홀경이 온몸에 스쳐 가는 듯한 표정. 고요.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깨어난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운 채 햇살이 흥건히 흐르는 길바닥에 한 동안 앉아 있었다.

이상한 침묵이 주변에 흐르고 있었고 필자도 말없이 두 어 시간가량 그 옆에 앉아 있었다.

 

 


 그가 일어나 비틀거리며 말없이 걸어갔다.


 다시 여인숙엘 들어갔다. 그는 곧바로 자리에 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임종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가부좌를 했던 그의 두 다리에는 불에 그을린 듯 거무스레한 반점이 누룽지 조각만한 크기로

군데군데 퍼져 있었다. 그리고는 하루 반 나절 동안 내내 누워 있기만 했다.

 

 


 필자는 몹시 당황스럽고 머릿속에는 별의별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상이란 시인의  어떤 글에 보면 죽기 전에

얼굴에서 하얀 열이 나오다가 그냥 사망해 버렸다는 사람의 얘기가 나온다.

그가 그런 경우가 아닐까? 죽으면 어쩌나?.. 등등


 

 그것이 필자가 목도한 쿤달리니 에너지의 폭발 현상이었다.

 

 

요가 행자들이 말하듯이 그것이 인간의 개화를 위한 신비주의적 과정인지 생리학이나

기타 과학으로 규명할 수 있는 현상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그 때의 경험이 필자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수행에 관한 책들을 뒤져보게 만들었다.

 

 


윤: 그때 당신에게 일어난 일은 쿤달리니 폭발 같은 것인가?


수: 그렇다. 그러나 모두가 열린 건 아니었다. 머릿꼭대기까지는 아니고 네 번의 폭발이 있었다.

     그것들이 어느 센터인지는 나도 모른다.


윤: 그 상황을 구체적으로 얘기해 줄 수 있나?


수: 그것은 전혀 예측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나는 명상을 해 본지 일 년도 되지 않았었다.

    가부좌란 게 뭔지도 몰랐고 쿤달리니란 말도 전혀 들어본 적도 없었다.

 

나중에 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

책에는 흔히 물라다라 차크라부터 열린다고 나온다. 그러나 내 경우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전등사에 있을 때 나는 왠지 참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계속해서 속이 울렁거리는데 그 정도가 심해져 갔다.

버스 안에 있는데 갑자기 알 수 없는 뱀대가리 같은 힘이 아래서부터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토할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오바히트를 할 지경이었는데 거의 미칠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몸 어디선가 우우웅-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자리에 앉자 엄청난 전압이 순식간에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더니

어느 순간 팍! 하면서 안에 있던 어떤 막이 터지는 것 같았다.

 

 

물라다라 차크라, 회음부 쪽이 아니라 다리 쪽 하반신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그 강압적인 전기 회오리가 더욱 진동음을 내며 위로 올라가더니

회음부, 복부, 가슴 부위에서 팍! 팍! 팍! 모두 네 차례의 파열음이 일어났다.

 

 

회오리는 가슴 부위에 이르러 더 이상은 올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엄청난 전압 같은 힘이 나를 꼼짝 못하게 붙잡아맸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거친 호흡,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거친 호흡이 일어났다.

나는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고 이대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꾸준히 명상을 하면서 마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걸러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내 경험으로는 쿤달리니 폭발은 내가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최적의 상태가 되었을 때 오는 게 아니다. 

 

 

불시의 상황에 막무가내로 자신을 덮친다.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이 몇 가지 일이 일어났는데 순서는 정확히 기억 못하겠다.

 

 


윤: 어떤 일이었나?


수: 아무튼 육체적으로 엄청난 멀미가 일어나서 몹시 힘들었다.

     그 와중에도 생전 처음 경험하는 황홀경 또 죽음에 대한 공포, 그런 것들이다.

    어느 것이 먼저고 뒤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황홀경 속에서 잠깐이긴 하지만 나는 함허 선사나 예수와 동일시했다.

 

때로는 선사, 때로는 예수의 재림이라는 환각이 생겼다. 그건 좀 이상한 일이다.

나는 기독교인도 아니고 오히려 교회를 싫어했다.

 

 

함허 선사는 중국인인지 한국 사람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왜?

우리가 전등사인지 어딘지 갔을 때 함허선사의 행장기가 적힌 비문을 보지 않았나?

그때 무의식 속에 저장되었던 것 같다.

 

  

윤: 니체는 어떤 책에서 예수가 말한 부활이란 개념, 혹은 신의 아들이란 선언은 그 사실적인 의미에서

    보다는 전면적인 심리적 변용의 체험에 대한 다른 이름,

존재적 전환의 극적 감정에 대한 표현이라고 한 것이 생각난다.

 

 

혹은 지복의 상태에서 나오는 표현이라고 했던 것도 같다.

 

또 심리학 용어 중에  그리스도 환상 혹은 메시아 환상이라는 개념도 있다.

그런 환상은 수행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마지막 입구에 들어가면서 종종 일어난다는 말을 들었다.

 예수나 그 비슷한 어떤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환상에 빠져 있었던 것 같은데.

 


수:(웃음)좌우지간 당신은  많은 걸 알고 있구나. 맞다.

   나는 육체적으로 몹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지복의 감정에 근접한 어떤 상태에 올랐다.

 

그것은 너무 황홀해서 나의 과거는 사라지고 신의 아들과 같은 무한성의 감정에 도달하였다.

확실히 잠깐 동안이나마 그런 환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마지막 입구에서 생기는 환상은 아니었다.

 

 

 대단히 강렬한 죽음에 대한 공포도 있었다.

너무나 강렬한 어떤 유혹과 극도의 위기감,

자칫 오랜 생 동안 돌아올 수 없는 미망의 세계로 빠져들 것 같은 위기감 사이에서

쉴새없이 요동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 죽음과 같은 무엇이 찾아왔다.

 

 

그것은 너무나 거대해서 그 속에 빠지는 순간 그 즉시 나의 모든 존재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때 나는 필사적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를 도와줘. 나를 구해 줘. 나를 세상으로 돌려보내 줘.


 

윤:누구였는가?


수:(껄껄 웃는다) 그건 바로 당신이었다.


윤: 오! 저런!... 하긴 그때 당신 주변에는 나밖에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겠군.

 


수: 그럴 것이다. 아마 전생에 우리는 친구였는지 모르겠다.

    마음속으로 필사적으로 불렀다. 오오--- 이대로 놔두다가는

    전신이 까맣게 타고 뇌수가 파열해 버릴 것만 같다.

 

 

이름을 간절히 부르며 살려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구해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내면의 처절함과는 엄청난 자석 같은 힘과 침묵이 나를 끌어당긴 채 놓아주질 않았다.


 

윤: 곁에 있던 나도 어렴풋이 그런 것을 느꼈다.

     침묵이란 말없음이 아니고 어떤 물질적인, 혹은 에너지의 상태처럼도 느껴졌다.


수:(웃음) 당신이 그만큼 예민해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고 그 이후로 명상을 해왔기 때문에

     그간에 쌓인 데이터를 통해 그때의 경험을 재해석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맞는 말이다.

 

 


침묵이란, 또 용기라든지 자비심이라든지 이런 것은 단순히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더욱더 미세한 에너지의 방사, 그런 것이다.

 

이것이 왜 단순한 좋은 사람이나 도덕가들이 곧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가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혹은 나약자나 비겁자, 악당들이 그 반대가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명상이란 절대 관념적인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생명력의 에너지 상태, 파동을 질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에 따라 내 의식이나 도덕적 행동에도 변화가 온다. 절대 도덕적 행동이 먼저가 아니다.


 (지면 관계상 2006년 1월호에 마지막 2회분이 연재됩니다.)